버거씨는 주말이라 집으로 친구와 친구의 아들을 초대했다고 했다.
"친구가 사실 최근에 부인이랑 이혼을 해서 아주 많이 힘들어하거든. 그래서 내가 위로를 해주려고 초대했어. 마침 아들이 우리 큰애랑 동갑이라서 같이 오라고 했지."
"그래 좋은 생각이야. 그리고 친구를 위로해 줄때는 많이 들어줘야 하는거 알지? 혼자 또 계속 말하지 말고."
버거씨는 이번에는 정말로 노력해보겠다고 약속했다.
"나 닭강정 만드는 것 좀 자세히 알려줄 수 있어? 친구랑 친구 아들한테 닭강정을 맛보게 하고 싶은데..."
"진짜로? 닭강정 어려운데 괜찮겠어?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고."
농담섞어서 좀 거만한 척 대답해 보았다. 그건 오로지 나만이 만들 수 있는거였음 하는데.
"당연히 네가 만드는 것 처럼 완벽하게 만들 자신은 애초에 없고. 그냥 대충 흉내만 내 보고 싶은거지. 한번 해 볼게, 도와줘."
결국 나는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었고 버거씨는 열심히 받아 적었다.
그날 저녁 버거씨가 완성된 닭강정 사진을 보내주었다.
저런... 실패했구나...
나는 위로를 해 주려고 했는데 버거씨는 매우 흡족해 하고 있었다.ㅋㅋ
실패했다고 보내준 사진인줄 알았건만 알고보니 자랑하는 거였네.
나는 얼른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닭강정은 정말 만족스러웠는데... 내가 오늘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아."
어이쿠... 위로할 때는 조언보다는 그냥 들어주기만 하라니까.
"어쩔수가 없었어. 나역시 비슷한 경험으로 절망했던 시절이 있잖아. 그런데 나는 지금 너를 만나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고. 내가 이만큼이나 행복한 사람이 될거라고 그 당시에 누가 알았겠냐고. 그래서 나는 말을 해 줘야만 했어. 안맞는 파트너와 서로를 괴롭히며 결혼생활을 유지하는게 정답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언젠가 그 친구도 우리처럼 꼭 맞는 상대를 만나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어쩌다보니 네 자랑을 너무 많이 하게 된 게 좀 마음에 걸리긴 해. 하지만 그 친구는 정말 흥미롭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구."
나는 웃고 말았다. 이번에도 결론은 여친 자랑이었군.
잠시 후 나는 메세지로 버거씨에게 [나도 당신덕분에 어두운 터널에서 나올 수가 있었어. 나의 영웅.] 이라는 메세지를 보냈다.
그리고 하트 이모티콘을 띄우려고 했는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이모지가 튀어나와서 한밤중에 육성으로 시원하게 뿜어버렸다.
윙크하는 이모지옆에 뚱한 표정의 우리 할머니 얼굴이 박제돼 있었다.
가족소풍때 벚꽃 나무 그늘에 앉아계시던 할머니께서 본인의 장녀(울엄마)를 탐탁치않게 바라보고 계신 표정이다. 울언니랑 아이폰 사진 편집 기능을 확인하는 도중에 내가 뭘 눌러서 저렇게 만든 모양이다.
문제는 저걸 지우는 법을 모른다는 점이다.
우리 할머니 얼굴 보면서 맨날 웃으라는 뜻인가. 볼 때마다 웃음이 나긴 해.
할머니 생각 맨날 하겠네.
버거씨와의 대화가 완전히 잊혀질 만큼 임팩트가 강했던 우리 할머니 얼굴이 오늘 포스팅의 결론이다.
이거 혹시 어떻게 지우는지 아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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