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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한국

지하철에서 목격한 세대간 논쟁

by 낭시댁 2017. 6. 9.



벌써 10년도 넘었다. 친구와 헤어지고 지하철로 귀가하던 중에 목격했던 아주 흥미로운 사건이 있었다. 

구로에서 금정으로 가는 1호선 지하철 안이었고 밤 10시쯤 됐던것 같다. 나는 당시 출입구앞에 서서 바깥 야경을 바라보며 이어폰으로 음악감상에 열중해 있던상태라 주변에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어느순간 유리창으로 비치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쪽으로 향하고 있는걸 느끼고는 놀라서 이어폰을 뽑고 상황 판단을 위해 돌아섰다. 

알고보니 사람들은 나를 보고 있는게 아니라 내 옆에 서있는 커플을 보고 있는거였다. 커플이 워낙 다정해 보여서 유리를 통해 나도 몇번 흘끔거리고 봤었다. 그런데 대각선 끝에 앉아 계시던 60대 후반쯤보이는 할아버지께서 가만히 서있는 그 커플에게 큰소리로 꾸중(?)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요즘 어린놈들은 저렇게 남들이 보건말건 아주 그냥~ 아이고~

한두마디만 하고 끝내면 될것 같은데 큰 목소리로 계속 그러고 계셨다. 

"여기가 어디라고 저러고 둘이 붙어서서" 

정말 그 커플은 아무짓도 안했다. 듣는 내가 다 억울한데도 이 커플은 고개를 숙인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셨을텐데도 할아버지의 잔소리는 멈추기는 커녕 점점 강도가 심해졌다. 

"잘못 배워서 그래. 부모는 자식이 밖에서 저러고 다니는줄을 모르니까" 

어쩌고 저쩌고 할아버지는 지치지도 않는다. 커플을 흘끔 돌아봤더니 그 남친이 주먹을 불끈쥐고 얼굴이 시뻘게지면서 점점 인내의 한계에 다다르는듯한 모습이었다. 잘생긴 미남형인데 화나면 진짜 무서울것 같았다. 주먹쥔 모습이 마치 옛날 만화 주인공 독고탁같은.. 그 여친은 남친의 성격을 잘아는지 울먹거리면서 남친의 주먹을 보듬으며 "오빠 참아 제발 우리 다음역에 내리자 그냥 가만있어 제발 제발" 하며 속삭이고 있었다.  

눈치없는 할아버지는 이것도 모르고 계속 잔소리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저거봐 저거봐. 부모가 집에서 요즘 다 잘못 가르치니까 그게 문제라니까"  

독고탁 남친의 인내가 드디어 바닥이 나버렸다. 시뻘겋게 열받은 얼굴로 할아버지께 뚜벅뚜벅 걸어갔고 할아버지 급당황해서 양팔을 휘저으며 태도가 돌변하셨다. "젊은이 말로해요 이봐 젊은이.." 남친은 분을 못이겨 할아버지 머리위 벽을 소리나게 주먹으로 짚으며 소리쳤다. "당신이 내 부모에 대해서 뭘 알아!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남한테 무슨 피해를 줬는데! 부모얘기를 왜 하는건데! 당신이 우리 부모를 알아?!" 

에구에구..저럴줄 알았다.. ㅠ.ㅠ

"젊은이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내가 너무 했어요. 이제는 안그럴게요. 자리로 돌아가세요.. " 

혼자 남겨진 여친은 기어코 울음이 터졌다. 달래주고 싶었으나 놀랠까봐 그냥 나는 가만히...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된다. 제3의 인물이 등장하는것이다.  


할아버지 앉은 자리 저쪽 구석에서 한눈에도 교수님스러운 중년의 아저씨가 젊잖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이보세요 젊은이, 어르신한테 그게 뭡니까. 사실 어르신이 너무 하신거는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젊은사람이 한참 연세드신분한테 그렇게까지 하는건 심하다고 봐요." 

독고탁 남친은 그자리에 고개를 푹 숙이고 서있었다. 에고고..  할아버지는 계속 "내가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이제 그만 모두 그만해주세요" 라며 계속 중얼중얼하고 계셨다.  

"어르신께서 많이 놀라셨네요. 여기서 지켜보는 모든분들이 아마 젊은이가 화내는거 이해할 거에요. 그래도 그런식으로 어르신을 협박하는건 잘못된거에요. 어서 사과드리세요" 

이때 제 4의 인물이 등장했다. "3번 아저씨" 바로 맞은편에서 신문을 펼쳐들고 얼굴을 가리고 앉아있던 아저씨가 있었는데 갑자기 짜증섞인듯 신문을 소리나게 팍 접으면서 그누구도 말발로는 못이길것 같은 포스로 토론(?)에 동참했다. 30대 후반쯤? 안경을 꼈고 어느 대기업 영업팀장스러운 여유있고 당당한 느낌이랄까. 꼭 인연이 되면 다시 뵙고싶은 멋진분이었다. ㅎㅎ 

"죄송한데요, 제가 원래 어디가서 이런데 절대 참견 안하는 사람인데요, 가만히 듣고만 있으려니 도저히 화가나서 안되겠네요. 저 젊은이가 어르신한테 한 태도는 분명 잘못됐어요. 근데 왜 저친구한테 자꾸 뭐라고 합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봤어요. 어르신이 얼마나 심하셨는지요" 

"네 어르신이 너무 했어요. 그래도 어떤경우라도 젊은친구가 한 행동은 용납할 수 없는거에요" 

"그런데 저친구만 몰아세우시는것 같아서요. 사실 저 친구가 나서기 전에 저라도 어르신한테 먼저 한마디 할뻔 했어요. 너무 심하셨어요. 저 커플이요, 맨 처음부터 제가 봤는데도 잘못한거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어깨에 손엊은거 밖에 없어요. 요즘 젊은이들이요, 안건들면 알아서 질서도 잘 지키고 어르신들한테 양보도 잘해요.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공개적으로 큰소리로 무안주고 부모얘기까지 나오는건 용납되는건가요? 할아버지께서 저 두분 데이트를 오늘 다 망치신거에요" 

"이제 그만들 하세요.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요. 다신 안그럴게요"  할아버지가 아무리 사과해도 이제는 아무도 안듣는다. 

"아무리 그래도 젊은 사람이 어른한테 이렇게 공개적으로 겁주고하는건 어떤 식으로도 용납 안돼요. 분명히 사과드려야 해요. 어르신도 지금 잘못했다고 하시잖아요" 

"여기 계시는 분들 다 공감하실거에요. 새치기하고 질서 어기는 사람들 대부분이 연세드린 어르신들입니다. 젊은 사람들 그거 보고 뭐라 안해요. 근데 적어도 가만히 있는 젊은 사람들 함부로 판단하고 욕하는 행동은 제발좀 자제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 친구들 기분좋게 지하철탔다가 이유도 없이 봉변당한거에요" 

말발 딸리는(?) 독고탁 남친과 영감님은 이제 조용해졌고 아저씨들 두분이서 열띤 토론이 계속 이어졌다. 사실 약간씩 흥분하긴했으나 점잖게 계속 이어졌고 승객들은 어느새 청중이 돼서 한사람씩 발언이 끝날때마다 맞아맞아하며 각자의 토론자들을 지지했다. 나역시 4번아저씨를 열열히 지지하며 고개를 힘차게 끄떡끄떡했다. ㅎㅎㅎ

아쉽게도 내가 내릴때가 되어서 토론회의 끝을 보지는 못한채 집으로 돌아왔고 집에와서 엄마아빠언니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울엄마는 3번아저씨가 등장했을때 맞는말이라며 수긍하다가 4번아저씨 얘기까지 들으셨을때는 4번아저씨를 더 지지했다. ㅎㅎ 

이제 그 할아버지는 다신 잘못없는 젊은이들 훈계하고 그러진 않으실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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