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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한국

내가 태어나던 날

by 낭시댁 2023. 5. 20.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난생 처음으로 배춧국을 끓여보았다.
 
요즘 배추 비싸던데 시어머니께서 주신 덕분에 배춧국이라는것도 끓였네. 어릴적엔 흔하게 먹었던 배추 된장국이라 귀한줄도 몰랐는데...
미원을 좀 쳐주니까 진짜 엄마표 맛이 난다ㅋㅋ 역시 우리 엄마 음식의 비밀은 미원이었다.

 
별다른 반찬 없이 대충 밥이랑 소시지, 감자볶음을 쟁반에 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으잉? 우리 엄마가 웬일로? 
 
우리 친정식구들로 말할것 같으면... 
 
모든 식구들 다 포함해서, 내가 20년 가까이 해외생활을 하는 동안, 먼저 나에게 전화를 걸어준 경우는 다섯번쯤 되려나... 
 
특히 한국은 늦은 저녁이었던지라, 일찍 잠자리에 드는 우리 친정 부모님을 생각한다면 평범한 사건이 아닐수가 없었다. 당연히 무슨일이 생겼나 싶어서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곧 영상화면속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우리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웬일이래, 전화를 먼저 다 걸고? 깜짝 놀랬네." 
 
"오늘 우리 딸 생일이잖아. 음력 생일." 
 
아... 그랬나? 
 
"미역국은 아무도 안챙겨주지...?" 
 
나조차도 내 음력생일의 존재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자서방 의문의 일패ㅋ 
 
그런데 우리 엄마 오늘따라 왠지 감상적이시다. 
 
"내가 이날을 어떻게 잊어... 우리 막내딸 세상에 나오는줄도 모르고 아빠따라 밭에 일하러 갔잖아..." 
 
수십번 들었던 레파토리지만 오늘따라 코끝이 찡하다. 내가 그때의 엄마보다 나이가 많아져서 그런가보다. 정말 그렇다. 그때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렸다.

 
"어제일 처럼 생생하다. 니네 오빠는 1학년이었는데 우리 마을앞 솔밭으로 봄소풍간다 그래서 김밥 싸보내고... 다른집은 엄마들이 소풍에 다 따라가는데 나는 못간다고 대신에 할매가 소풍에 따라갔어. 겨우 세살된 니들 언니는 오빠 소풍에 못따라가서 아침나절 울다가, 엄마아빠 밭에 가는데 따라 나오드라. 그 어린거를 혼자 놀게 두고... 그때는 왜 그랬나몰라... 오전에 아빠랑 일하다가 점심 준비하러 일찍 밭에서 내려 올라고 보니까, 원주집네 논두렁옆 풀숲에서 니들 언니가 혼자 자고 있드라... 그 모습이 아직도 선하네... 언니 안고 집에 내려와서 평소처럼 아무 생각없이 부엌 문지방을 넘는데 갑자기 니 머리가 쑥 빠져 나오드라. 언니한테 소리지르면서 빨리 작은집에 가서 작은 할매 불러오라 그랬지. 그 어린게 지도 놀래갖고는 바로 쫒아내려가드라글쎄..." 
 
자신의 몸도 제대로 돌 볼 겨를 없이, 그저 당연하다는 듯 어제처럼 오늘을 고단하게 살던 우리 엄마를 위해 나는 진통도 없이 수월하게 세상에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아들이 아니라서 집안에서 축하는 제대로 못받았지만 나는 세상 밝게 자랐다.ㅋ 아빠는 심지어 그날 속상해서 이웃집 하나네서 술을 드셨다고 한다. 서운하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 본적이 없다. (우리가 다 자라고나서 부모님께서는 아들이 둘인 대신에 딸이 둘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입모아 말씀하신다ㅋ)
 
 
"우리딸 내가 미역국도 못 끓여주고..." 
 
"엄마 이거봐, 대신에 내가 배춧국 끓였어. 처음 끓였는데 진짜 맛있다." 
 
엄마가 센치해지셔서 일부러 더 큰소리로 말했다. 
 
 
며칠전 어버이날에 나는 대단한 선물은 못드리고 과자랑 아이스크림을 친정으로 잔뜩 주문해서 보내드렸다. 한참 일할때는 한해 보너스(13월)를 엄마에게 통으로 보내드릴 정도로 넉넉히 인심을 쓰곤 했었는데 이제는 선물이 참 소박해졌다. 우리 엄마아빠는 본인들을 위한 군것질거리는 직접 살 줄을 모르셔서 이렇게라도 보내드려야 드신다. (몸에 좋은 견과류나 건강음료보다 이제는 그냥 단 걸 두분 다 더 좋아하시는 것 같다.)
 
"니가 보내준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먹어야겠다. 엄마 잘 먹으께... 미역국 대신 배춧국 맛있게 먹고... 우리딸 잘 있어." 
 
우리 엄마는 돼지바를 입에 물고 소녀처럼 손을 흔들며 전화를 끊으셨다. 
 

배춧국을 먹는데 뭔가 여운이 오래가네...
 
 
 

무식아... 엄마 할머니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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