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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DéFLE-Lorraine 다국적 친구들

우크라이나 친구 vs 이란 친구

by 낭시댁 2023. 4. 6.

얼마전 선생님께서는 발표 과제를 하나 내 주셨다. 

 

"각자 자기 나라의 예술작품을 골라 5분짜리 발표를 준비해 오세요. 어떤 예술이든 상관없어요. 문학, 그림, 건축, 음악, 영화 등등 자유롭게 선택하면 됩니다." 

 

난 뭘로 할까... 한국 문화는 뭐 이제 세계적으로 알려져있으니 굳이 내가 뽐낼 필요 있나... 후훗ㅋ (결국 나는 고민만 하다가 아무것도 준비 하지 않았고 선생님이 시키시면 즉흥적으로 발표하려고 몇가지 머릿속으로만 구상해갔다.) 

 

며칠 후 수업시간에 우리는 각자 준비해 온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콜롬비아 소년은 음악까지 곁들여서 콜롬비아의 음악과 춤을 함께 소개했다. 살사 동작까지 자연스럽게 곁들이면서 정말 유쾌하게 5분을 꽉 채웠다. 필리핀 친구는 한 고전문학을 소개했는데, 이 필리핀 작가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실상을 알리는 내용의 이 책을 일부러 스페인어로 써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읽게 만들었다고 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브라질 친구는 국민 만화영화 한편을 소개했다. Turma Da Monica. 50년대에 만들어졌는데, 올해 36살인 이 친구는 본인 세대뿐 아니라, 그의 부모님도 이 만화영화를 보며 자라셨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다양한 에피소드로 온 국민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우크라이나 소녀는 애니메이션 영화 한편을 소개했다. 현재 프랑스 극장에서 상영중이니 가서 꼭 보라고 했다. 주인공은 자연의 정령같은 느낌인데 멸종위기의 동물들과 환경오염에 맞서 자연을 수호하는 케릭터라고 한다. 

어느덧 수업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선생님께서는 마지막으로 한사람만 더 발표하자고 하셨고, 이란인 소녀가 앞으로 나갔다. 

 

그녀는 수업시간 내내 본인의 노트북으로 발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그저 5분짜리 유튜브 영상을 하나 틀었을 뿐이었다. 발표주제인 예술과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이란인들이 시위 도중 어떤 핍박을 받는지를 고발하는 아주 무거운 내용이었다. 

 

"아... 이건 너무 정치적인 소재에요... 오늘의 주제는 예술인데... "

 

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우리를 향해, "이걸 보고나서 이란의 상황에 대해 궁금한게 있으면 나에게 질문하세요." 라고 말하며 영상을 끝까지 재생시켰다. 

 

"수업중에는 정치나 특정종교등 논란의 여지가 있는 소재는 부적합해요... 자자... 수업시간도 끝나가니까 이쯤에서..." 

 

선생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네갈 친구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리 어학당에서 목소리 크고 말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국적이 바로 이란인들인데: 물론 조용한 친구들도 분명 있겠지만! 아프리카인들도 만만치가 않다는것을 요즘 느끼고있다.ㅎㅎ) 아무래도 같은 무슬림국가라서 본인들의 종교는 평화를 지향한다는것을 밝히고 싶었던 것 같다. 

 

내 앞에 있던 우크라이나 소녀가 자신도 할 말이 있다는 듯 손을 몇번이나 들었는데 그 손이 떨리고 있다는걸 나는 감지했다. 뒤늦게 발언 기회를 얻은 그녀가 갑자기 울먹거리며 말을 시작했다. 

 

"내 나라에는 전쟁이 나고 있다고! 오늘의 주제는 예술이잖아! 내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폭격으로 죽어가고 있는데도 나는 만화영화를 웃으며 소개했어! 내가 너희 나라의 시위이야기까지 공감해 줘야 하는거야?!"

 

스므살 금발의 키작은 난민소녀는 결국 펑펑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 순간에는 말많은 세네갈 청년과 이란인 소녀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가장 당황스러운 사람은 역시 선생님이 아니셨을까... 

 

"아... 이래서 수업중에는 정치, 종교같은 심각한 주제는 피하는거예요... 걱정말아요. 별일 아닐거예요."

 

여전히 자리로 돌아가지 않은채 앞에 서 있던 이란인 소녀를 향해 선생님은 다정한 목소리로 달래셨는데, 이란인 소녀는 선생님이 자신을 원망하는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리고 싶었던거예요." 

 

"네 알아요... 그저 오늘 주제가 예술이었으니까... " 

 

"저는 말도 못해요?!"

 

헐... 

 

그녀는 선생님께 화를 내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본인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난감하네이... 

 

수업 종료시간은 진작에 끝났는데... 

 

우리 선생님의 다음 수업을 들으러 온 학생들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고,

이란인 소녀는 화장실에서 펑펑 울고 있고,

선생님은 울며 화를 내고 있는 이란인 소녀를 달래느라 다음 수업은 커녕 지금 수업조차 마무리를 못하고 계셨다.

 

결국 우리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친구들과 집으로 오면서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의견이 분분했지만 두 소녀모두 고국의 상황때문에 예민했던 걸로... 

 

"근데 선생님 오늘 정말 황당하셨을거같아. 잘못하신것도 없는데 수업중에 두명이나 펑펑 울다니;;"

 

내 말에 친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요즘에는 조용한 나라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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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연해지는 중이다.

수업중에 춤판이 벌어진 사연

작은 전시회 그리고 작은 음악회

행복은 가까이, 항상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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