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구했고 주말에 이사를 나가겠다고 남편에게 말을 꺼냈다.
자신이나 시부모님의 보증도 없이 내가 혼자 힘으로 집을 구했다니 꽤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단순한 거주증명서 조차도 자기는 절대 안써줄거라고 차갑게 말하던 그였다.
"가긴 어딜 가겠다는거야? 난 나가라고 한 적 없다? 한국에 들어갈때까지 그냥 여기 있어."
"이혼하자는 남편이랑 어떻게 같이 사니. 나 한국 안들어갈거야."
"정말 프랑스에 남을 작정이야? 최저시급으로 살 수 있을것 같아? 살아남을수야 있겠지. 쇼핑도 못하고 여행도 못다녀. 말그대로 생존만 가능하다는거야!"
쇼핑이나 휴가는 너랑 살때도 못했는데... 라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남편은 불같이 흥분하며 최저시급으로는 못산다며 자꾸만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괜히 도발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날 저녁 남편은 약봉지를 나에게 내밀었다.
"류마티스나 생리통때 먹는 진통제랑 잠 안올때 먹는 멜라토닌 좀 샀어. 약 떨어지면 약국에 똑같은 이름 말하면 살 수 있을거야. 그리고 엄마한테 이제 너한테 연락해서 쓸대없는 서류 쓰라는 말 다신 꺼내지 못하도록 내가 확실히 말해놨어. 아예 우리 일에 신경끄시라고 했으니 더이상 연락 안하실거야..."
나는 약봉지를 말없이 받아들었다. 눈물이 나는 걸 참았다. 이제 아플때 약 챙겨줄 사람이 없겠구나... 마지막으로 미리 약을넉넉히 챙겨줘야겠다고 생각했나보다.
이사 나가기로 한 전날 저녁 남편은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지난 두 달간 이렇게 많은 대화를 한적이 있었던가…)
"내일... 몇시에 나가? 짐 옮겨줄까?"
"아니야. 당신 자고 있을 때 아침 일찍 나갈거야. 알마가 큰 차 가져오기로 했어."
"그래... 필요한거 있으면 다 가져가."
나는 그날 밤늦도록 짐을 쌌다. 위자료나 재산분할이 없으니 조금이라도 아껴야된다는 생각에 최대한 다 챙겼다. 수건에 목욕가운에 발수건 등등... 무스카델이 짐싸는데 졸졸 따라다녀서 눈물이 몇 번 났다. 무스카델에게 오래오래 작별 인사를 했는데 얘는 귀는 닫은 채 내 손만 쳐다보네. 나 내일 떠난다고... 하아... 넌 건강해야 해... 아빠랑 사이좋게 지내...
남편은 그날따라 일찍 자러 들어갔다. 아마 침실에서 소리 없이 울고 있었을 것이다. 이건 확실하다.
2024년 2월 11일 일요일. 이른 아침에 알마의 차로 이사를 나갔다. 생각보다 짐이 너무 많아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알마가 가져온 차가 충분히 컸다. 낑낑거리며 함께 차에 짐을 싣고 또 새 아파트까지 날라준 알마에게 미안하고 너무다 고마웠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새 아파트에다 짐을 대충 던져놓은 후 우리는 스타니슬라스 광장에 아침을 먹었다.
라떼와 크루아상은 정말 눈치 없게도 맛있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내 감정 상태와는 다르게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어쩜 이리도 맛있는거니!! 결국 라떼랑 크루아상을 한개씩 추가로 더 시켜먹었다.
알마는 내 용기가 자랑스럽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자기였다면 절대 이겨내지 못했고 친정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했을거라고 말이다.
"십년전인가 남편따라 낭시에 처음 왔을 때 시어머니랑 남편이 이곳 스타니슬라스 광장으로 나를 데려왔던게 생각나. 어찌나 아름답던지. 하얀 바닥이 햇빛에 반사돼서 광장 전체가 눈이 부셨어. 태어나서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본 적이 있었던가 싶었지. 지금 나는 그 가족들과 남이 되었고 너랑 이렇게 이곳에 앉아있네. 인생 참 재미있어..."
알마는 내 넋두리를 오래오래 들어주었다.
"너 필요한 거 많지. 바로 사지말고 나한테 말해. 우리집에 안쓰는 물건들 굉장히 많아. 에리카나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일테니 단톡방에 필요한 물건들 올려주면 우리가 구해볼게. 정 못구하는 것들은 우리가 선물할 수도 있고 그 외에도 나중에 주말에 내가 운전해 줄테니까 저렴하게 생활용품 파는 곳으로 가 보자. 이제 어떤 문제가 생기든 꼭 나한테 다 말해, 알았지?"
"친구야 어떻게 이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어..."
"고맙다는 말 좀 그만해. 나중에 나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너도 똑같이 할거잖아. 우리는 외국인이니까 특히나 서로 도와야 한다고."
"네가 도움이 필요할 때면 나는 열 번도 더 도와줄거야! 밥도 열 번 사줄거야!"
"아파트 정말 잘 구했더라. 위치도 너무 좋고 이렇게 스타니슬라스 광장이 가까우니 주말 아침에 커피 마시면 정말 좋겠다! 우울할 때 혼자 집에만 있지말고 광장이든 공원이든 나와서 걸어다녀. 나한테 전화 자주 하고, 알았지?"
다음 날 또다른 친구 SK는 이불과 접시 그리고 머그컵을 바리바리 싸들고 찾아왔다. 그녀는 내가 사기를 당할까봐 집 계약을 할때도 바쁜 시간을 쪼개서 따라왔기때문에 우리집의 위치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 덕분에 나는 전기도 연결하고 집 보험에도 가입할 수가 있었다. 나 혼자서는 절대 못했을 일들이었다.
이런 소중한 친구들을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잃어버린것들 말고 얻은것들에 집중해야지… 그들 덕분에 나는 무너지는 세상에서 조금씩 솟아오르고있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서는 여기가 어디인가 잠깐씩 혼란스러웠다. 내 배를 침대 삼아 자던 무스카델도 없고 아플때 약을 챙겨주는 남편도 없다. 아파트가 춥기는 또 얼마나 추운지! 프랑스에서는 이렇게나 추운집이 보통이라며 그동안 얼마나 쾌적한 곳에서 살아온거냐며 친구들이 농담을 했다. 원래 실내에서도 외투를 껴입고 사는게 보통이라고 한다. 나는 몰랐네.
이제 새 삶에 적응해 나가야지. 지나간 과거에 미련두지 말자. 말 그대로 이제는 다 과거가 되었고 나의 새 인생이 펼쳐질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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