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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새출발

봄이 오고 있었다.

by 요용 🌈 2024. 7. 15.

3월의 어느 토요일.  
여전히 낭시의 날씨는 한겨울이었다.
 
퇴근 후 나는 룩셈부르크행 기차에 올랐다.
주말마다 버거씨가 나를 만나러 오곤 했는데 이번에는 버거씨가 룩셈부르크를 구경시켜주겠다며 나더러 한 번 와달라고 했던것이다. 
 
기차에 오르는데 심정이 복잡해졌다. 남편과 정말 끝났다는 사실을 내가 완전히 받아들인게 맞나 싶기도 했다. 
 

 
버거씨로 부터 문자메세지가 왔다. 
H-1
 
우리가 만나기까지 한 시간이 남았다는 소리다. 어제는 D-1이라고 메세지를 보내왔었는데. 아이처럼 카운트다운을 하며 얼굴볼 때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것이다.
 
잠시 후 기차 창밖으로 마법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머릿속의 혼란스러운 목소리들이 일제히 멎었다.
해질녘 하늘에 보랏빛으로 물든 채 낮게 내려앉은 구름더미들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불과 얼마전까지 나의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는데,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색깔의 세상이 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하늘에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던가보다. 순간적으로 나에게 이혼을 통보한 남편에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노래 Do I have what it takes가 풍경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서 내 심장을 기분좋게 콕콕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보랏빛 하늘을 치켜다보며 이 노래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다.
 
룩셈부르크행 기차는 저녁 노을 뿐만 아니라 예쁜 마을과 호수등의 풍경들도 다채롭게 보여주었다. 여전히 꽁꽁 얼어붙은 듯 차가운 모습이었지만 어쩐지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 했다. 유난히 끔찍했던 이 겨울이 드디어 끝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봄이 내 인생에 찾아오고 있구나. 
 

 
버거씨덕에 난생처음 가 본 룩셈부르크. 
이렇게 바로 근처에 있는데 왜 그동안 한번도 가 볼 생각을 안했을까. 소파에서 누워지내던 남편때문에 나까지 바깥세상과 너무 단절된 채로 살아왔던것 같다. (우습지만 나는 그 작은 세상에서도 행복했었다.)
 

 
룩셈부르크는 대중교통이 모두 공짜였다!
우리는 외곽에 차를 세워놓고 트램을 타고 서너정거장을 이동해서 시내로 갔다. 
먼저 올드 타운을 구경시켜줬는데 현대식 건물이 가득한 곳에 수백년된 타운이 조화롭게 보존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날씨는 흐렸지만 우리는 오래 걸으며 많은 대화를 나누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버거씨는 훌륭한 가이드였다. 
내가 3년간 근무했던 싱가포르와 자꾸만 비교를 하게 되었는데 버거씨는 매우 흥미롭게 들어주었고 우리는 곧 룩셈부르크와 싱가폴 사이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함께 토론하기도 했다. 

그랜드 두칼 궁전. 그러니까 이곳은 룩셈부르크 최고 통치자인 대공작이 거주하는 곳이다.
이 궁전 바로 맞은편에 초콜렛 디저트가게에서 우리는 핫초코와 치즈케이크를 먹으며 몸을 녹였다. 인상적인 것은 가게 직원들이, 내가 영어로 말하면 영어로 대답해주고 프랑스어로 말을 하면 프랑스어로 대답을 해 주었다는 점이다. 이 가게에서 우리는 꽤 오래앉아 별별 농담을 주고 받으며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웃기는 버거씨가 웃긴데 버거씨는 내가 더 웃기다며 앞으로도 제발 이 모습 변치 말아 달라고 말했다. 
 

룩셈부르크 시내에서 절벽을 타고 올라가는 엘레베이터를 탔다. 희한한 경험이었다. 

 
버거씨는 본인이 근무하는 직장 근처를 구경시켜줬다. 본인이 일하는 곳, 점심때 자주가는 레스토랑, 동료들과 일주일에 두번가는 근처 헬스장 등등 본인의 일상을 신나게 소개해 주었다.
 
안그래도 날씨가 쌀쌀했는데 갑자기 차가운 비가 쏟아졌다. 우리는 영화속 한장면 처럼 손을 잡고 열심히 달리며 깔깔 웃었다. 둘다 제법 다리가 길어서 다른 행인들보다 두배는 빠르게 달린것 같다.
 
빗속을 헤치며 버거씨가 나를 데려간 곳은 소피텔 라운지였다. 

이곳에서 우리는 칵테일을 마시며 해질녘의 아름다운 올드타운의 풍경을 감상했다. 야경은 역시 해질녘이 최고다. 노을빛을 배경으로 도시에 조명이 하나 둘 켜지는 모습 말이다. 

버거씨는 아직 룩셈부르크 투어가 끝난게 아니라고 했다. 
강변에 있는 레스토랑에 저녁식사를 예약 했기때문에 서둘러 가야 한다고-
 
아 일정 너무 빡세다고요... 
 

 
아스파라거와 와인소스를 얹은 송아지 스테이크- 엄청나게 부드러워서 둘다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강변의 풍경이 분명 아름다운 곳이었을텐데 밖이 너무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식사 후 강변을 걸으며 (강바람은 좀 추웠지만) 소화도 시키고 여전히 수다를 이어갔다. 버거씨의 소개팅 굴욕 에피소드를 들으며 너무 웃겨서 강변이 떠나가라 웃기도 했다. 버거씨는 민망해하다가 내가 웃으니 자기도 좋단다. 

 
어딜가든 무얼 먹든 나는 진심으로 즐거워했고 버거씨는 그런 내 모습을 보니 더 기분이 좋다고 했다.
앞으로 보여줄 것들이 엄청 많다며 기대해도 좋다고 했다.
기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