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세일기간이라 출근길 시내가 시끌벅적했다. 나도 덩달아 들뜬 기분으로 출근을 했다. 직장과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어서 출퇴근이 참 편리하다.
내가 일하는 작은 한식당은 시장안에 있다. 오늘은 시장에도 주말이라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이 붐비고 있었다.
오늘 손님이 많겠는걸?
오뎅볶음을 넣은 꼬마김밥을 10줄 정도 쌌는데 한줄만 남기고 금새 다 팔려서 기분이 좋았다. 토요일에는 단골 손님들이 많이 오는 날이라 우리는 반가운 인사를 반복하곤 한다. "봉쥬~!"
비빔밥을 항상 두개씩 사가는 비빔밥 아저씨는 바캉스를 가게 되어서 당분간 못오게 되었다고 미리 알려주셨다. 무뚝뚝한 표정이지만 어찌나 다정하신지. 이런 츤데레 단골 아저씨들이 몇분 계시다. 샐러드만 종류별로 포장해 가시던 샐러드 할아버지네는 지난주부터 김밥을 하나씩 꼭 사가신다.
오후에는 빵집에서 일하던 총각이 일을 그만두게되었다며 인사를 하러 왔다가 디저트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알고보니 이 총각은 알제리에서 왔는데 드디어 원하던 엔지니어 직장을 구하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나는 말귀를 못알아들어서 제때 축하를 해주지는 못했고 다만 먹음직스러운 에끌레어를 급하게 베어물고는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었을 뿐이다.
기분좋은 하루가 되려나 하고 있을때 일이 생겼다.
우리가게 바로 앞으로 우리 시부모님이 지나가고 계셨던 것이다. 시어머니께서 "봉쥬"하고 인사를 하시기에 나는 당연히 나를 보러 오신줄 알고 "잘 지내세요?(ça va?)"하고 인사를 드렸는데 시부모님은 아무 대답없이 그냥 내 앞을 지나쳐 떠나버리셨다.
방금 무슨일이 일어난거지...
내가 저분들께 무슨 잘못을 했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더니 옆에 있던 동생이 대신 대답해줬다. 언니는 잘못한거 없어요.
마찬가지로 어이없어하던 SK는 말했다. 네가 혼자 너무 잘 지내고 있는것 같아서 속상하신가봐.
아... 이렇게 정을 떼시는구나. 굳이 나랑 대화를 나눌것이 아니라면 우리 가게앞을 지나쳐가실 이유도 없으셨을텐데. 이로서 우리의 가족관계는 끝이 난건가보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온 종일 기분이 울적했다. 어릴적 꿈속에서 우리 엄마가 나를 보고 넌 이제 내딸이 아니라고 하셨을때 배게가 흠뻑 젖도록 울었던 그 악몽이 떠올랐다.
남편이 이혼을 원한다고 울면서 처음 말씀 드렸을때 시어머니는 차라리 잘된거라며 나더러 새출발을 하라고 하셨다. 아무래도 남편은 예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하시며, 이혼을 하더라도 나와 시부모님의 관계는 변함이 없을거라고 하셨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도와주실거라고 하시며.
내가 혼자 힘으로 독립을 해서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는데... 프랑스어도 잘 못하고 보증인도 없고 전기를 연결하고 집보험에 가입하고 하나하나 쉬운 일이 없었는데...
집은 잘 구했니. 집이 춥지는 않니.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는거니... 내가 자식이라고 하셨으면서 이런것들은 한번도 안 궁금하신가요...
퇴근을 하고나서 마음을 식힐겸 공원을 하염없이 걸었다.
울적한 기분이 들때마다 (주로 무스카델이 보고싶을 때) 나는 습관적으로 머리를 세차게 흔든 후 씨익 웃어버리곤 한다. 그리고는 별일이 아닌것 처럼 머리를 의식적으로 비우도록 애쓴다. 그런데 오늘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SK말대로 본인의 아들은 여전히 어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나는 너무 잘 지내는것 같아서 속상하신 것일까. 나는 시장에서 시어머니의 향수냄새가 나면 어머님이 오셨나 싶어서 두리번 거리곤 했었는데...
결국 아무 결론 없이 오늘도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씨익 웃으며 머릿속을 털어버렸다. 생각하면 뭐하나. 이제 우리는 정말 남이 되었나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니 글쎄, 낯선 젊은 남자가 뒤따라 오며 말을 걸어오는 게 아닌가? 조금전에 공원에서 마주쳤던 남자네?
"실례합니다."
그 남자는 내가 아름답다고 느꼈다며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고 했다. 너 내가 몇살인지 아니... 아니다. 말해주지말아야지. 긴장된 표정으로 나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하던 남자는 호감을 사고 싶었던지 한국에 대해 아는 것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모카라떼?? 한국인 유튜브를 즐겨본다나...? 어느정도 대화를 나누다가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나는 대화 즐거웠다고 좋은 저녁되라고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고 했는데 그 남자가 내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나중에 시간되면 테라스에서 한 잔하며 대화 하는거 어때요? 프랑스어 연습도 내가 도와줄게요."
평소같으면 무시했을텐데 에라 모르겠다하고 번호를 줘버렸네. (금방 메세지 왔길래 무시했다;)
시부모님때문에 기분이 안좋았는데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이 나이에 젊은 남자한테 길에서 번호를 따이다니 하하
나 이런 여자였다. 길에서 번호따이는 예쁜녀자ㅋㅋ 어디다 자랑하나 고민했는데 블로그에다 쓰면 되는구나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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