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날.
오후 4시에 퇴근했던 나는 기차로 한 시간을 달려 티옹빌에 도착했다.
역에서 나를 픽업한 버거씨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낮에 혼자 어떻게 크리스마스 파티를 준비했는지 열심히 들려주었다. 엄청 들뜬 얼굴이다. 역시 프랑스에서 크리스마스는 아이들만을 위한 명절이 아니구나. 특히 버거씨는 올해 크리스마스는 더 행복하다고 하는데 얼굴만 봐도 그걸 느낄 수가 있었다.
버거씨 거실에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그사이 업그레이드를 받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꼭대기에 별도 달았고 반짝반짝 조명도 걸치고 있었다. 그 밑에는 선물 꾸러미들이 있었는데 가장 큰 꾸러미 두개가 내꺼였다.
낮에 시내에서 열심히 쇼핑을 했다더니 테이블에 예쁜 데코가 되어 있었다.
참 섬세하다 이 남자.
버거씨는 또 집안 구석구석으로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아기자기하게 데코를 한 흔적들을 자랑했다. 이거 하느라 낮에 바빴단다.
50대에 이렇게 헤맑기 있기없기. 오늘따라 소년미가 넘치네.
그 좋아하는 파파야도 사놨다고 자랑했다. 파파야만 보면 라팔마 같이 여행 갔을때 그 호텔 테라스가 떠오른다나.
파파야는 다음날 아침에 잘라 먹었고 이날부터 매 끼니마다 샐러드에는 감이 들어갔다.
내가 귤을 하나 까먹었더니 맛있는거 많이 먹을건데 왜 벌써 그런걸로 배를 채우냐며 속상해했다.
냉장고에서 장봐온 재료들을 나열하며 열심히 자랑하는 버거씨.
질 좋은것들로만 산 건 알겠는데... 매년 시어머니의 화려한 노엘 식사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초라해보이네. 하지만 곧 고개를 흔들고 정신을 차렸다. 이 남자가 혼자 열심히 준비한건데 뭐든 고맙게 생각하자. 내가 도울수 있는건 열심히 돕자.
장봐온 재료들을 다시 냉장고에 정리해 넣던 버거씨가 말했다.
"이 정도면 26일까지 먹을건 충분하겠지? 일단 오늘 저녁에는 샴페인이랑 굴, 훈제연어 그리고 바다 거미(araignées de mer)를 먹자."
음 내가 지금 뭘 들은거지...
"... 거미?"
"응 이거."
하... 이런 큰 게를 프랑스에서 아헤녜(거미)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래 뭐 거미처럼 생기긴 했다. (난 게는 좋아해도 거미는 질색하지만!)
쪄서 파는 걸 두 마리 사왔다는데 아들들까지 우리는 네 명이니까 각자 반쪽씩 먹자며 버거씨는 게를 반으로 자르기 시작했다. 대체 왜 때문에 딱딱한 등딱지까지 반으로 자르느라 용을 쓰는거냐...
굴도 까야 된다길래 그건 내가 하겠다고 자처했다.
나를 못미더워하는 표정이었지만 버거씨가 언제 저 게(등딱지)를 자르고 굴까지 다 까려나 걱정돼서 내가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빨리 하고 빨리 먹자 좀...
내가 손을 다칠까봐 불안해 하던 버거씨는 결국 나에게 앞치마까지 입혀주고는 나에게 신뢰의 눈빛을 보내주었다. 나 이거 많이 해 봤다니까 그러네...
조촐하지만 평화로운 버거씨네 크리스마스 이브가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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