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마다 만나는 우리 커플.
티옹빌 기차역에 도착했더니 평소보다 좀 더 신경쓴 듯한 모습으로 나타난 버거씨.
오늘 어디 좋은데 가려나.
"오늘 저녁을 위해 두가지 제안을 할테니 네가 더 좋은걸로 골라봐. 하나는 일전에 갔다가 허탕쳤던 호텔 라이브바. 두번째는 그날 갔던 레스토랑에 다시 가서 그날 못먹었던, 그 레스토랑 스페셜티인 족발 튀김을 먹는거지."
난 둘 다 좋은데. 뭐가 더 좋은지 모르겠다. 대신 이건 물어봐야겠다.
"라이브바에 가도 우리 뭐 먹을거지?"
기차에서 간식을 먹긴 했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
그럼 라이브바에 가자. 토요일 저녁이니까 뭔가 고급진걸 해 보자.
버거씨는 내심 라이브바가 더 끌렸던가보다. 내 대답에 흡족해보인다.
버거씨의 차는 호텔이 있는 언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야경도 좋지만 나중에 낮에도 와보면 좋겠다.
르 도멘 들라 클라우스 호텔 (le Domain de la Klauss) 홈페이지 메인에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3개 국경 지방의 심장인 몬테나흐의 일곱 언덕 가운데에 세워진 르 도메인 들라 클라우스 호텔, 5성급 호텔과 명성 있는 이곳의 스파는 여러분을 시간을 초월한 세계로 안내할 것입니다. 영지에서 가져온 돌을 깎아 만든 웅장한 건축물과 야외 구조는 주변의 봉건적 유물을 반영하는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느낌과 현대적인 매력이 공존하는 이 공간의 핵심 키워드는 단순함, 차분함, 풍만함입니다.
버거씨 말로는 이 가문에서는 이 호텔 뿐만 아니라 농장 등 다양한 사업을 큰 규모로 하고 있다고 한다. 오랜 기간 이 지역의 유지(?) 가문인듯 하다.
버거씨는 참고로 이 호텔 스파에 예약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좋은 소식은- 예약에 성공했다는 점이고,
나쁜 소식은- 5월 초가 가장 빠른 날짜였다는 점.
그냥 주말에 가볍게 다녀오자고 한건데 결국 5월 초에 스파에서 내 생일을 기념하게 되었다나-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실내.
뭔가 와인이 맛있을 것 같은 분위기다.
안으로 들어갔더니 피아노가 보이고 앞쪽에서는 섹소폰 연주를 하고 있었다.
바의 한가운데에는 벽난로가 타고 있어서 덕분에 실내에 온기가 충분했다.
저 벽난로 아니었음 와인 저장고 마냥 추웠을것 같다.
버거씨는 모히토, 나는 피나콜라다를 마셨다.
훈제연어를 한 접시 시켰다. 버터가 너무 맛있어서 연어없이 버터랑 빵만 꽤 축냈다. 이래서 내가 버터를 안산다... 한번 사면 내가 다 퍼먹을것 같아서...
라이브 연주하는 아저씨가 어느순간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노래를 썩 잘하지는 못했다 ㅡㅡ;
지난번에 왔을때도 저 아저씨였구나...
5성급 호텔에서 왜 저런 가수를 고용하나 싶었는데 원래는 섹소폰 연주가였던 것이다.
내가 소곤거리면서 노래를 못한다고 말했더니 버거씨가 아저씨를 적극적으로 두둔하고 나섰다.
"솔직히 저 정도면 노래 잘하는 편 같은데... 객관적으로 평균 이상 아니야...?"
"그래 노래방에서 누가 저렇게 부르면 잘한다고 손뼉칠것 같긴 해."
"거봐. 나쁘지 않다니까?"
근데 이 아저씨는 이게 직업이라고... ㅡㅡ;
필리핀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할 때 우리 가게에는 작은 무대와 함께 한국식 (금영)노래방 기계가 있었다.
손님들은 5페소씩 내고 앞다투어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불렀다. (진정한 흥의 민족!) 예약이 언제나 너무 많아서 자기가 예약한 노래를 부르려고 집에도 못가고 한참 기다리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덕분에 매상에 도움이 되었지... 기다리는 동안, 혹은 노래 부르고 나서 맥주 한 병씩 더 시키는 경우가 흔했으니까.
그때 우리 가게에는 주말마다 오는 밴드가 있었다. 기타치는 선생님이랑 23살 여제자(가수)였는데, 그 가수 소녀는 금영 노래방 기계에 홀딱 반해서 아무때나 와서 공짜로 노래를 부르게 해달라고 나에게 사정했고 나는 흔쾌히 허락을 했었다. 나는 덕분에 무료로 평일에 가수를 쓸 수 있었고 그녀는 남들이 돈내고 노래할 때 공짜로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좋아했다.
이 이야기를 버거씨에게 들려주다가 내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여기가 필리핀이었음 저 아저씨는 돈을 오히려 내고 불러야 돼."
버거씨가 빵 터졌다.
실력만큼 무대 매너가 좋았던 우리 가게 여가수는 내가 필리핀을 떠난 몇 년후 잘 지내고 있다며 이메일로 근황을 전해주었다. 우리 가게에서 경험을 쌓은 덕분에 그 후 몸값도 많이 올랐고 결혼식 공연 등 일거리가 많아져서 바쁘게 지낸다고. 이메일을 쓰는 그날도 결혼식 공연때문에 보라카이에 와 있는 중인데 갑자기 내 생각이 났다고 했었지. 그녀를 생각하니 또 웃음이 나네. 사랑스럽고 재미있었던 그녀.
"아 우리 가게에서 사장만큼은 예외로 우선예약이 가능했어. 주말 밤에 여사장이 한국노래 부르러 올라가면 손님들이 얼마나 좋아했다고ㅋㅋㅋ"
나는 당시를 회상하며 몸을 씰룩씰룩하면서 그루브를 타 보였다. 그때 한창 미나의 전화받아가 유행했었지. (그때도 동남아에는 이미 한류가 있었다.)
아 옛날이여.
벌써 20년 전이네. 얹그제 같은데... 지금 나는 나이를 먹고 프랑스 국경에 앉아있구나. (여전히 마음만은 20대임.)
섹소폰 아저씨가 다행히(?) 노래를 멈추고 본업인 섹소폰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저씨는 섹소폰 부를때 제일 멋져요...
나는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뜨겁게 박수를 쳐 드렸다. 흉본게 미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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