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랑 저녁을 먹고 있는데 엄마에게 할머니로 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를 끊으신 엄마가 슬며시 웃는 얼굴로 말씀하셨다.
"할머니 오신대. 그림 그린거 갖다주러."
"그림? 할머니가 그림을 그려??"
내 말에 엄마랑 아빠는 마주보며 피식 웃으셨다.
"응. 온 식구들 한 권씩 다 줬어. 삼촌들도 언니도 나영이도 전부다 받았어. 내일 줘도 된다는데 지금 당장 니 줘야 된다고 오신단다. 에혀"
할머니가 그림을?!
그래, 인스타에서 보니 어떤 할머니는 80넘어서부터 그림을 그린다고 하더라.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들이 참 예뻤는데 우리 할머니도??
내가 은근한 기대를 하고 있을때 엄마가 서랍 어딘가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오셨다.
"자, 우리도 한 권 받았다. 할머니 그림 구경해봐라."
앜ㅋㅋ 이건 그린게 아니고 색칠공부자나요ㅋㅋㅋ
곧 할머니께서 현관을 열고 씩씩하게 들어오셨다.

"내가 그려놓은 그림이 참 많았는데 애들이 와서 다 갖고 갔나봐. 내가 그리기만 하면 끝나기가 무섭게 다 들고간다니까? 딱 한 권밖에 안남았네 글쎄."

엄마가 꺼내놓으신 거랑 새로 들고 오신거랑 두 권을 나란히 놓고서 할머니는 꽤 자랑스러워하셨다.
"다 봤나? 한 장 한 장?"
아, 나는 다시 주워들고 한 장 한 장 자세히 훑어보았다.
"내가 그렸지만 참 잘한거 같애. 내가 봐도 정말 잘 그렸어."
할머니는 정말로 이걸 그림이라고 표현하셨다.
사회복지사가 다녀갈때마다 이걸 한권씩 갖다줘서 시작하신건데 너무 좋아하셔서 언니도 몇번 프린트를 해서 갖다드리고 색연필도 사다드렸다고 한다.
"맞아, 진짜 잘했다. 너무 예쁘다."
"응 나도 내가 이런거 잘 할 줄 몰랐그등? 복지사가 올 때마다 놀래잖아. 다른 노인들은 못그린대. 내만큼 그리는 이가 없다고 맨날 놀랜다?"
음... 나이들면 색칠공부도 어려워지는건가.
잘은 모르지만 할머니께서 스스로 너무 뿌듯하게 말씀하셔서 열심히 칭찬을 해 드렸다.
"할머니 여기 밑에다 사인도 해주세요."

볼펜을 건네드렸더니 할머니께서 신중하게 사인까지 해 주셨다.

그 후로도 할머니의 그림 자랑은 계속되었다ㅋㅋㅋ
내가 한 장 한 장 자세히 봤다고 말씀드렸지만 굳이 한장씩 넘기시면서 다시 보여주심.
프랑스 갈때 들고 갈거냐고 물으시기에 그럴거라고 말씀드렸다. (막상 짐을 쌀 땐 기억도 안났음;; 쏘리 할머니)

부모님이 다른 이야기 화제를 꺼내도 할머니는 오로지 본인의 '그림'들만 쳐다보셨다.
"여기는 색깔이 좀 부족하네... 나 이거 다시 들고가서 그려와야겠다..."

할머니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나는 빵터졌고 엄마는 다시 안그려도 된다고 이미 완벽하다고 말리셨다.
아 울 할머니ㅋㅋ 표정만은 베테랑 화백이시다.
이전 포스팅 보러가기
길에서 낯선 할머니의 손을 잡아드렸다.
니스의 해변은 여전히 한 여름이다
필터링 없는 우리 할머니
생폴드방스에서 만난 친절한 상인들
'사는 이야기 > 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마지막 날까지 알차게 보낸 한국 휴가 (20) | 2025.05.17 |
|---|---|
| 한국을 듬뿍 느끼게 해 주겠다는 내 친구 (25) | 2025.05.14 |
| 결국 오늘 주인공도 할머니 (12) | 2025.05.13 |
| 필터링 없는 우리 할머니 화법 (24) | 2025.05.11 |
| 친구들덕에 한우 오마카세를 먹어봄 (9) | 2025.05.10 |
| 여고시절로 소환됨 (14) | 2025.05.09 |
| 든든한 언니들이 있다. (9) | 2025.05.07 |
| "여보, 친구들이랑 저녁먹게 십만원만 부쳐줘 봐" (15) | 2025.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