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면서 주말에 2주 연속으로 티옹빌로 가게 되었다. 좁은 우리집에선 두명이 지내기엔 너무 더운데 버거씨네 집은 시원하더라고..
그런데 잘만가던 기차가 메츠에서 멈춰버렸다. 안내방송으로 이 기차는 취소되었다면서 승객 전원이 다 내려야 된단다...
하아... 프랑스 기차는 정말이지...

내려서 추가 공지가 나오겠지 싶어서 전광판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빠져나갔다 ㅡㅡ;
그 자리에 남아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전광판을 쳐다보는 사람은 나랑 일본인 가족들 뿐인듯 했다.
거기다 더 황당한 추가 메세지를 받았는데 선로에 사람이 있어서(?) 티옹빌 역이 잠시 폐쇄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버거씨가 메츠로 데리러 온다고 근처 까페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메츠역 맞은편에 있는 테라스가 예쁜 바에서 시원한 빠나셰(맥주랑 복중아 아이스티를 섞은) 한 잔을 주문했다.

생각없이 앉았는데 알고보니 이곳은 전생에 배우자비자때문에 시부모님이랑 왔을때 점심을 먹었던 바로 그 레스토랑이었네.
오만가지 생각이 스친다.
참 인생 알 수 없구나.
나를 데리러 달려와주는 버거씨를 생각하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는 어릴적부터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도, 몸이 아파도 아빠한테 데리러 와 달라고 해 본적이 없다. 어릴적 비온다고 데리러 와 주면 안되냐고 교무실에서 딱 한 번 전화를 걸었다가 핀잔을 듣고 너무 상처를 받았더랬다. 그런 소리 들을 바에야 차라리 비를 맞고 다니지. 허리가 끊어지는 통증이 있는 날에도 그냥 걷다 쉬다 하면서 내 힘으로 귀가하는게 속 편했다. 친정아빠 영향이었나보다. 누가 조금만 챙겨줘도 크게 감동받아버리는거 말이다.

"기왕 이렇게 된거, 우리 메츠에서 주말 저녁을 보내는것도 나쁘지 않은것 같아."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버거씨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볼일을 보다가 급하게 달려온 버거씨는 와이셔츠차림이었다. 주말에 와이셔츠 차림의 버거씨를 낯선 도시에서 만나니 너무 색다르고 좋다.

기분 좋아지는 왁자지껄한 테라스에 운좋게 좋은 자리를 잡았다.

옆테이블에서 맛있어 보이는걸 먹길래 똑같은걸로 따라 주문했는데 넘 맛났다. 와인도 한 잔씩 마시니 기분이 너무 좋네?
기차가 중간에 캔슬된 걸 불운으로 여겼지만 덕분에 버거씨랑 메츠에서 좋은 시간을 보낼수 있게 돼서... 오히려 잘되었다!

행복한 기운이 가득한 주말 저녁의 인파들에 둘러쌓여 있었는데 그 기분을 버거씨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나보다.
"오늘따라 유난히 사람들이 더 붐비고 행복해보이지 않아? 코로나 격리가 해제된 날 사람들이 기다렸다는듯 우르르 몰려나왔던 그 날처럼 말이야. 이 시간 이 자리에 우리가 함께 있어서 너무 좋아. 이곳에 행복 에너지가 가득 느껴져."
역시 이 남자는 내 스타일이다.

와인을 마시고 나서 붐비는 거리를 좀 걷다가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아이스크림 주문할 때 뻔뻔한 대가족이 어영부영 우리앞에 새치기를 했는데 평소처럼 따지려던 버거씨가 이번에는 그냥 웃어넘겼다.
"너한테 배웠어. 별거 아닌일에 인상쓰지 말고 에너지 낭비 하지 말자는 거 말이야. 그냥 저 가족도 즐겁고 우리도 즐거우니까 이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네."
버거씨가 점점 나처럼 말하고 있다ㅋ
진짜 행복은 단순한 일상에 있다는 사실.
행복한 사람들 주변에 함께 어울려 지내는게 좋다는 사실.
공감해주어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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