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거씨네 동료들과 바베큐 파티를 한 이틀 후인 월요일이었다.
재택근무를 하겠다던 버거씨는 갑자기 휴가를 내게 되었다. 일요일인 전날 우리는 바베큐 파티때 남은 음식들을 쳐다보다가 이걸 어떻게 다 먹을지 잠깐 고민을 했고 버거씨는 그때 갑자기 "우리 엄마한테 갖다드릴까?" 라고 말을 한 것이 발단이었다.
버거씨네 부모님은 오래전 이혼을 하신 후 서로 다른 도시에 살고 계신다. 재혼을 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신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좀 외롭게 지내고 계시다고 한다. 버거씨는 어머니의 예민한 성격탓이라고 종종 말한 바 있다. 자주 찾아가면 부담스러워하시고 심지어 한번에 많은 인원이 찾아가면 예민해지셔서 누나네 부부와 함께 방문하는일도 드물다고도 했다.
"엄마한테 전화드려서 너랑 같이 먹을거 갖고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알았다고 하시더라. 오늘은 기분이 꽤 좋으신 목소리셨어."
뭐 나도 흔쾌히 좋다고 말했다.
월요일 오전, 버거씨는 빛의 속도로 먹거리들을 트렁크에 실었다.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던 샐러드도 담고 소시지도 담고 심지어 전기그릴팬까지 실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소풍가는 기분이 들었다. 신난다 랄라라
프랑스를 빠져나간 우리 차는 룩셈부르크를 지나고 독일을 거친 후 결국 프랑스 어느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ㅋ 무슨 이런 황당한 시츄에이션...?
오래전 개그콘서트에서 스튜어디스로 분장한 개그맨 변기수가 [인천공항을 출발한 우리 비행기는 일본을 경유하고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잠시 후 울산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뭐 이런 개그가 떠올랐다. 추가로 어릴적 소꿉놀이하던것도 떠올라서 혼자 막 웃었다.
촌에 살던 어린 시절 나는 마을 친구들이랑 산에서 소꿉놀이를 종종했다. 종이돈을 만들어서 누구는 야채가게, 누구는 식당 같은것을 맡는데 주로 풀이나 꽃따위로 정성껏 상품을 만들어서 가격을 매기고 손님을 받았다. 그런데 꼭 남자아이들은 서로 차장을 하겠다고 나섰다. 차장이라함은 산비탈에 기형적으로 옆으로 자라는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거기다 승객들을 태우고 열심히 나무를 발로 굴려서ㅋㅋ 태워주는 것이었다. 웃긴건 승객들이 한번에 여러명이 탄다는 점이다. 행선지가 다 달라서 누구는 서울이요! 부산이요! 나는 일본! 나는 미국! 외치는데 차장은 거절하는 법이 없다. 한번에 다 태우고 차장이 열심히 나무를 발로 굴려서 중간에 한명씩 내려주는 식인것이다. 차장은 지쳐가는데 부산에서 내릴 손님이 안내리고 미국까지 가기도 하고, 차장이 여기 미국이라고 다 내리라고 해도 승객들은 벌써 미국일리 없다고 더 태워달라고 조르는게 일상이었다. 이런데도 차장 역할은 항상 인기가 많았다ㅋㅋ
우리 버거씨한테 소꿉놀이 차장이야기를 들려줬더니 버거씨가 운전하다가 뒤집어졌다.
"가끔씩 우리는 일본과 미국을 거친 후에 서울에 도착하기도 했거든.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네."
우리가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을때 어머니께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입구에서 우리를 맞아주셨다.
현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것은 바로 이 개미였다. 다시 보니 노래를 하는 중이었구나.
어머니는 내내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나에게 테라스를 구경시켜주셨다.
테라스에는 무궁화와 수국이 수북하게 피어있었는데 모두다 어머니께서 직접 다 심으신거라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버거씨는 그릴에다 우리가 가져온 소시지와 고기를 구웠고 잠시 후 우리는 테라스에 둘러앉아 점심 식사를 맛나게 했다.
버거씨는 어머니께서 예민한 성격이 있으시다고 했지만 전혀 그런 느낌은 없었고 마냥 즐거워보이셨다. 그 덕분에 다들 기분이 좋았다.
식사 후에 어머니는 버거씨에게 무거운 화분 받침을 화분 밑에다 거꾸로 끼워달라고 부탁하셨다.
"리마쓰들이 자꾸만 내 식물들을 갉아먹어서..."
"리마쓰...? 아하! 이거 말씀하시는거 맞지요? 요기... 달팽이... 집없는 달팽이요."
내 말에 두 사람다 빵 터지며 맞다고 했다. 달팽이는 프랑스어로 에스카르고, 민달팽이는 리마쓰... 집없는 에스카르고라고 했더니 딱 이해한 것이다ㅋㅋㅋ
그 외에도 버거씨는 집안 이곳저곳을 보수해 드리느라 좀 바빴고 그 사이 나는 테라스를 구경하다가 복분자를 한가득 발견했다.
몇 개 따서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갔더니 어머니께서 좋아하셨다.
"그게 벌써 다 익었다니! 내일은 다 따다가 잼을 만들어야겠네."
테라스에 검은 토마토가 신기해서 쳐다봤더니 하나 따서 맛보라고 주셨다. 속은 그냥 일반 토마토 색깔이었고 맛도 큰 차이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생긴것만 보면 꼭 가지같아서 신기했는데.
냉장고에 붙어있는 흑백 사진을 들여다보았더니 어머니께서 설명해 주셨다.
"아 그거는 우리 할아버지랑 삼촌이예요. 둘다 블렁제리를 운영하며 빵을 만들었지요. 뒤에 그녀는 당시 우리집 수련생이었어요."
우와... 버거씨네 할아버지는 파티시에셨다고 했는데 외할아버지는 블렁제셨구나. 이러니 버거씨의 입맛이 남다를 수 밖에.
"이건 뭐예요?"
"아, 그건 살구씨앗이예요. 말려서 아몬드처럼 껍질을 깨고 그 속에 있는 열매를 가지고 베이킹을 할거예요."
오 살구씨를 먹는다는건 또 몰랐네.
어머니는 점차 내가 편해지셨는지 본인에 관한 이야기들을 쏟아내셨다.
"나는 대학을 못나왔어요. 하지만 나이를 먹고서 대학교에서 주민들에게 해주는 수업을 10년동안 들었어요. 거기서 나는 철학이 제일 재미있었어요. 플라톤, 스피노자등 거기 다 배웠지요."
철학 이야기 뿐만 아니라 테라스에서 타이치를 하시는 이야기, 요리나 음식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하셨다. 버거씨에게 이미 들으셨던건지 본인께서도 헤스만헤세의 싯타르타를 재미있게 읽으셨다고 하셨고 샤갈의 그림책도 꺼내서 보여주기도 하셨다.
아쉬운 첫만남을 뒤로하고 나오는 길 어머니께서는 오래오래 아파트 입구에 서서 우리를 배웅하셨다.
"같이 시내에 나가자고 말씀드리지 그랬어?"
내 질문에 버거씨가 이렇게 말했다.
"같이 외출하는거 별로 안 좋아하셔. 거기다 우리 엄마 오늘 많이 긴장하신 것 같아. 평소보다 말씀이 너무 많으시고 횡설수설하시는 듯 했어."
"난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던데? 그냥 아주 즐겁고 들떠보이셨어."
"아, 네 말이 맞는것 같다. 널 만나서 즐거우셨나봐."
"나도 아주 즐거웠어."
"나도 나도!"
사실 문득문득 우리 시어머니가 떠올라서 마음 한켠이 좀 시린 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버거씨의 어머니께서 예상 이상으로 나를 반갑게 맞아주셔서 감사하고 즐거웠다.
과거는 이미 과거가 되었다.
새로 펼쳐지는 챕터에만 집중하고 과거는 그만 생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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