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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새출발

나는 햇빛이고 별빛이다. 헤헷

by 요용 🌈 2024. 10. 18.

티옹빌로 가는 토요일 오후.

별 생각없이 편한 복장으로 기차역으로 향했다가 레스토랑 예약에 성공했다는 버거씨의 메세지를 보고는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가서 구두랑 드레스를 챙겨서 달려나와야만 했는데 다행히 기차를 놓치지는 않았다.

 

버거씨는 이날 처음으로 기차역으로 나를 배웅나오는데 지각을 했다. 

 

"미안해. 매형이랑 둘이서 루미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어." 

 

"당신이 이겼으면 괜찮아. 이긴거 맞지?" 

 

"......" 

 

버거씨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졌구나. 

 

 

버거씨네 집에 도착해서 식구들이랑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옷을 갈아입고 다같이 레스토랑으로 갔다. 

일전에 버거씨가 나를 한번 데려온 적이 있는 골프클럽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테라스에서 보는 탁 트린 골프클럽 전경이 예쁘다. 

 

테라스에서 식전주를 마신 후에 실내에서 식사를 하기로 하고 다같이 테라스로 나갔다. 

누나랑 어머님이 골프클럽 전경을 둘러보러 일어나길래 나도 따라갔다. 

해지는 저녁하늘과 푸른 잔디 색깔 조화가 참 곱다. 눈이 맑아지네. 

나랑 누나는 버거씨를 따라서 피노그리 화이트 와인을 시켰고 매형은 맥주를, 그리고 어머님은 로렌지역에서 생산되는 화이트와인을 주문하셨다. 

어머님은 내 이름의 정확한 발음을 거듭 확인하셨다. 

 

"혜연이예요. 어렵지요?" 

 

사실 프랑스어에서는 H가 묵음인데다 받침도 발음이 어려워서 대부분 내 지인들은 대부분 나를 '예용'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예용으로 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어머님께서 내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시면서 동시에 기가막힌 해답을 주셨다. 

 

"아하! 혜연! 햇빛의 혜연이구나!" 

 

그 말에 버거씨가 무릎을 탁 치면서 "맞네! 너는 빛나는 혜연이다!" 라고 말했다. 

 

으음?

!!!

 

프랑스어 동사 rayonne 헤욘 (동사원형: rayonner 헤요네)은 '빛나다'라는 뜻이다. 그 생각은 또 한번도 해 본적이 없었네.

(프랑스에서는 H가 묵음이지만 R은 또 ㅎ에 가깝게 발음을 한다.) 

 

"와 진짜 감사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제 이름이 어려워서 외우지를 못하거든요. 발음도 어렵고요. 이제부터 누가 이름을 물으면 빛나는 혜연이라고 말하면 쉽게 기억할 수 있겠네요."

 

"그렇지. -저는 혜연이예요. 햇빛처럼 혜연. 하지만 H예요.- 이렇게 말하면 되겠네."

 

버거씨가 한번 더 설명을 해주었다. 

 

나 빨리 누구한테 내 이름을 말해주고 싶다ㅋㅋ 시장 사람들도 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앞으로는 좀 달라지겠지? 

 


와인을 마시는데 직원이 안주를 가져다주었다. 짭짤하고 고소한 스틱인데 손으로 들고 먹기 참 좋네.

그러고나서 포카치아라면서 또 다시 서비스 안주를 갖다 주었다. 

따끈해서 더 맛있었던 포카치아- 

덕분에 입맛이 돌아서 메뉴를 펼쳐들었다. 

메인 메뉴가 primi piatti와 secondi piatti로 나눠져있었다. 

 

"이건 아마 엉트레랑 메인으로 나눠진거겠지? 하지만 가격을 보면 엉트레 가격이 아닌데?" 

 

"음... 좋은 지적이야." 

 

버거씨는 직원이 왔을때 내가 질문한 내용을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직원의 대답. 

 

"primi piatti가 엉트레라는 뜻이기는 한데 사실 양은 그냥 본식이예요. 그래서 가격도 본식 가격이지요. 이탈리아는 엉트레로 파스타를 먹는다나봐요." 

 

직원이 참 살갑다. 

 

다들 엉트레랑 본식을 먹으려고 했는데 엉트레가 양이 많다니 갑자기 혼란이 왔다. 그 모습을 본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엉트레 양을 반만 드릴까요? 두분이서 하나를 주문하시면 저희가 두 그릇으로 나눠드릴 수도 있어요." 

 

다들 원하는 대답을 듣고 흡족해 했다. 정말 싹싹한 직원이었다. 

 

식전주를 마신 후 우리는 실내로 들어왔다. 

야외는 이제 해도 떨어지고 기온도 떨어졌다. 

우리가 주문한 엉트레가 나왔다. 어머님은 넓적한 면을 주문하셨고 누나네 부부는 트러플버섯이 얹어진 스프를 시켰다. 

나랑 버거씨는 소고기 트러플 파스타를 하나 시켰는데 직원이 두접시에 나눠서 갖다주었다. 

이미 배가 부른것 같은데... 

한참 수다를 떨다보니 메인 음식이 또 나왔다. 

 

나랑 버거씨는 문어 요리를 시켰다. 보기엔 안 많은거 같은데 은근히 먹다보니 양이 많았다.

아래에는 야채가 듬뿍있었고 문어 구이도 맛있었다. 

 

어머님은 리조또를 시키셨는데 굉장히 초록초록했다. 

 

어머님은 이날 기분이 매우 좋으셨다.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일부는 수위가 좀 아슬아슬했다고 한다ㅋㅋ 버거씨가 자꾸 나더러 "너 알아들었는데 못알아들은척 하는거지?" 라고 물었는데 정말로 나는 하나도 못 알아 들었음. 그래서 어머님이 뭐라고 하신건데...? (버거씨는 안알랴줌...)

 

배는 불러도 디저트는 챙겨먹었다. 일전에 여기서 먹은 티라미수가 정말 맛있었기때문에 이번에도 시켜보았다. 

어머님은 아이스크림을 드셨는데 정말 맛있다고 하셨다. 

 

잠시후 셰프가 나와서 테이블을 돌면서 인사를 했는데 어머님께서 큰 소리로 셰프에게 정말 완벽한 저녁이었다고 감사 인사를 하셨고 셰프가 환하게 웃으며 고마워했다. 

 

식사비는 매형이랑 버거씨가 반반씩 냈다. 

덕분에 저도 잘 먹었습니다! 

배불리 먹은 우리는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에 들어가는데 하늘을 올려다보니 (사진상으로는 잘 안나왔지만) 별들이 총총 박혀있었다. 

 

"버거씨~ 제일 빛나는 별은 어디에 있지?"

 

"요기에 있지." 

 

우헤헤 나는 햇빛이고 별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