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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새출발

이렇게 말 많은 프랑스인이 또 있다니

by 요용 🌈 2024. 10. 31.

이전 포스팅에서 이어집니다-

함께 있으면 든든한 사람

 

역 바로 앞에 위치한, 마음에 쏙 드는 아파트를 찾은 이후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위해 급하게 그쪽에서 요구하는 서류들을 사이트에 등록했다. 


몇 가지 더 확인할 사항들이 있다며 버거씨가 중개인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시도했는데 또 연락이 안되네 ㅡㅡ; 진짜 프랑스 중개인들은... 하...  중개인 휴대폰 번호를 알려달라고 사무실 직원에게 요청을 했는데 그에 대한 답변도 못받았다. 

그쪽에서 알려준 링크에 직접 등록해야 할 서류들이 나는 11개, 갸헝(보증인)인 버거씨는 8개나 된다! 과거 3개월치 급여명세서, 2년치 세금납세증명서, 근로계약서 등등... 필요한 서류들을 일단 하룻밤만에 모두 등록했다.

 

하지만 이틀 후 추가 등록 서류가 더 필요하다면서 발신전용 이메일이 왔다. 우리가 문의한 내용들은 하나도 답변도 안해주고 필요할때는 발신전용이라니... 내 이혼증명서가 필요하단다! 왜 때문에? 거기다 지난 3개월치 월세 납입영수증을 보내야 하는데 말안통하는 우리 집주인이 영수증 발행을 거부하고 잠수를 탔다 ㅠ.ㅠ

 

갈수록 일이 꼬이네... 힝...

 

"너무 스트레스 받지마. 이것 때문에 이 집을 놓친다면 우리랑 인연이 아닌거지 뭐. 우리같은 세입자와 갸헝을 놓치는건 그쪽 손해지. 이렇게 소통이 안되는 중개인과 계약하는것도 좀 아닌것 같고 솔직히 역 앞은 위치도 좀 찜찜했어. 여긴 그냥 잊어버리자." 

 

버거씨는 좀 더 적극적으로 다른 매물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버거씨를 보니 그냥 버거씨 말을 믿고 마음의 여유를 갖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찰나! 이틀쯤 후 마음에 드는 또다른 아파트를 봉꾸앙 사이트에서 발견했다.

이 집에는 세탁기도 있는데 가격이 꽤 저렴하고 위치가 정말 좋다! 집 주인에게 우선 메세지를 보내놓고, 버거씨한테 이른 아침부터 집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했다. 최대한 빨리 방문 헝데부를 잡아달라고 말이다.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버거씨는 바로 그 집주인과 전화 통화로 방문 일정을 잡았다. 뜻밖의 일사천리!

 

"이 집주인이라는 사람, 믿을 만한것 같아. 목요일날 너 퇴근하고 시간 된다고 말해놨고, 네 번호를 전달해 줬어. 방문 할 때 내가 인쇄해준 서류들 잊지말고 가져가. 아파트가 마음에 들면 바로 서류 건네고 최대한 빨리 계약하고 싶다고 말해." 

 

집주인은 나와 버거씨에게 동시에 문자로 헝데부 일정을 통보해 주었다. 프랑스인 답지않게(?) 일처리가 빠르고 깔끔했다. 무엇보다 우리 버거씨랑 이름이 똑같네?! 좋은 징조다! (엄밀히는 버거씨의 이름이 그 남자의 성이랑 똑같다.) 

 

말이 안통하는 답답한 중개인들과, 내 월세 영수증 발급을 거부하고 연락도 안받는 지금 집 주인같은 사람들만 상대하다가 이렇게 빠르고 정확하게 커뮤니케이션 하는 사람을 만나니 우리는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전화로 잠깐 통화했는데 이 집주인 남자는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게 느껴졌어. 내 직감은 나쁘지 않거든. 이번에는 잘 될 것 같아." 

 

뭐 버거씨 눈은 꽤 정확하니까 이번에는 나도 예감이 정말 좋았다. 

 

 

헝데부가 있던 목요일 오후- 

 

늦지 않게 시간 맞춰서 나갔는데 낯선 두 여성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혹시 집보러 오셨나요? 저는 여기 살다가 지난달에 이사나간 사람인데 오늘 에따델리유를 하는 날이거든요. 집보러 오신다고 얘기 들었어요. 아저씨는 좀 늦으시나봐요." 

 

에따델리유(etat des lieux)란 이사 전/ 후에 집 주인이나 중개인과 함께 집 상태를 확인하는 절차이다. 집주인은 에따델리우와 내 방문을 한꺼번에 처리하려고 일정을 겹치게 잡았나보다. 사람 좋아보이는 젊은 여성은 새언니와 함께 나왔는데, 이 집에서 파트너와 총 3년을 살았다고 한다. 

 

"이 집 살면서 정말 만족했어요. 위치도 좋고 집주인도 너무 좋아요. 지금은 임신을 해서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 건데, 이 집에 살게 되시면 만족하실거예요." 

 

친절하고 믿음이 갔다.

 

잠시 후 자전거를 타고 도착한 주인남자는 딱 달라붙는 레깅스 차림으로 도착했다. (버거씨 말로는 본인도 50대 초반이라고 버거씨한테 먼저 알려주더란다.) 그런데 나이에 비해 근육이 어우... 리스펙... 성격도 서글서글하고 전에 살던 세입자들과는 살갑게 비쥬를 하네? 이 부분은 살짝 문화충격. 

흡사 이런 근육을 자랑하는 새 집주인ㅋ

 

아파트를 둘러보는데 일단 춥지는 않겠다 싶었다. 이만한 현대식 아파트를 구하는것도 어렵더라... 세탁기도 있고 욕조도 있고... 현관이나 엘리베이터도 깔끔하게 관리되고 (그래서 관리비는 꽤 있지만) 월세는 저렴했다. 

 

이런곳은 놓치면 안되겠다 싶어서 아저씨에게 서류를 모두 건넸다. 

 

"필요한 서류는 다 들어 있을거예요. 다만 월세 납입 영수증은 집주인이 발급을 거부하고 있어서 못받았어요. 이메일로만 확인서라고 작성해 주길래 그걸 스크린샷해서 인쇄했고요, 매달초에 같은 금액을 입금한 은행 거래 내역은 지금 바로 보여드릴게요." 

 

아저씨는 내 말을 다 믿는다며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유심히 은행 앱 기록을 확인하기는 했다ㅋ 

 

"어휴 이 정도면 저는 다 믿어요. 그리고 프랑스어가 불편하시면 영어로 하셔도 돼요. 저도 영어는 좀 합니다. 그 집주인 정말 이상하네. 저는 매달 영수증 요청하지 않아도 바로 보내드릴거예요."

 

시원시원하다. 

 

"서류를 검토해 주시고 최대한 빨리 확정을 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래야 저도 지금 집주인한테 한 달 노티스를 줄 수 있거든요." 

 

"오늘 저녁에 연락 드리지요!" 

 

"와! 완벽합니다!"

 

전 세입자들이 떠난 이후에도 이 남자는 말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이름이랑 연령대만 같은게 아니라 말 많은것 까지 버거씨랑 비슷하구나...

 

"사실 이 집은 제 소유가 아니라 제 여자친구껀데 관리만 제가 대신 해주고 있어요. 그녀는 별 관심이 없거든요." 

 

그 사람은 개인교사일을 하면서 철학, 프랑스어, 수학을 가르친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말이 더 많아지기전에(?) 서둘러 헤어졌다. 오늘 저녁에 꼭 연락달라고 당부하면서- 

 

약 2시간 후 계약을 하자는 메시지가 왔는데 버거씨한테 전화로 이 소식을 알려줬더니 이미 그 남자가 버거씨한테도 먼저 전화를 했다고 한다. 

 

"이 남자 진짜 사람 좋은것 같아. 내가 금융업에 종사한다는걸 알고는 자기도 한때 은행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집안사정때문에 포기해야 했다고 말하더라. 지금은 심플하게 사는 삶에 만족한대. 아들이 넷이 있고 전부인이랑은 이혼하고 지금은 여자친구랑 살고 있다네." 

 

"헐... 벌써 친구가 된거야? 얼굴도 본적 없는 사람한테 사적인 이야기를 그렇게나 한다고? 프랑스인들 특징인거야?" 

 

"오 아니야. 나한테도 이건 좀 낯설었어 하하. 전화통화 진짜 길게 했어. 계약이랑 상관없는 사적인 이야기들 말이야. 진짜 나보다 말 많은것 같아. 근데 믿을만한 사람임에는 틀림 없는듯 해. 다음 주말에 계약하기로 했고 보증금은 내가 수표로 가져간다고 말했어. 이건 내가 알아서 할테니 걱정마."

 

... 월세 두달치인 보증금을 내 주겠다는 말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버거씨한테 한번 더 감동했다. 월세 절반정도를 커버해 주던 정부 보조금이 이달부터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서 이사자체가 좀 부담되기는 하던 차였는데.  

 

아직 해결되지 못한 사안들이 몇가지 있긴 하지만 하나 둘씩 일이 풀리는 기분이 든다. 버거씨가 행운을 가져다준것 같다. 버거씨말대로 우리가 힘을 합치면 못할 게 없구나. 최고의 세입자와 최고의 갸헝이 만났으니 말이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