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했던 남프랑스 휴가는 끝이났고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른 아침 시장으로 출근을 했다.
낭시 정말 춥구나...
SK 말로는 내가 없던 지난주 낭시는 어마어마하게 추웠다고 한다. 니스 해변에서 햇살을 만끽하고 있을 내가 부러웠다고 말이다. 그리고 내가 돌아오자 날씨가 갑자기 풀렸단다. 풀린 날씨가 이렇다고...?! 으메 춥다.
실은 추운게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내일인 토요일 오후 4시에 집 주인과 Etat des lieux (집 비운 상태 점검)가 잡혀 있다. 그 의미는 그 전에 이사를 마치고 말끔히 청소까지 끝내놓아야 한다는 뜻. 결국 토요일 하루 더 휴가를 써야만 했다.
휴가랑 이사랑 이렇게 촉박하게 잡힐 줄 알았다면 휴가를 미뤘을텐데... (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집주인때문에 이렇게라도 일정이 잡힌 사실 자체가 거의 기적에 가까웠음)
휴가 내내 이사 때문에 마음을 졸일때면 버거씨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걱정마. 내가 있잖아."
그 한마디가 크게 위안이 되기는 하더라.
그런데 니스에서 어느 젊은 커플이 작은 카트에 싱글 침대를 싣고 아슬아슬 걸어가는걸 본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본 버거씨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저게 바로 우리의 미래 모습이야! 하하"
나는 웃음이 나지 않았다 ㅡㅡ;
버거씨는 트럭을 빌려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걸어서 5분 거리니까 그냥 둘이서 옮겨도 되겠다고 말했다. 나는 귀가 얇아서 또 버거씨가 된다고 하면 되는 줄 안다.
니스에서 본 커플이 끌고가던 똑같은 크기의 카트를 SK한테서 빌려왔다. 버거씨는 이걸 보더니 이것만 있으면 아무 문제 없다고 말했다.
버거씨는 금요일 룩셈부르크에서 퇴근을 하자마자 낭시로 달려왔다. (전자렌지, 테이블, 의자, 그릇, 컵, 쟁반 등등 온갖 살림들을 한가득 챙겨서 말이다.)
목요일 저녁에 휴가에서 돌아왔는데 하루 출근하고 바로 이사를 도와주러 달려온 버거씨를 보니 너무 미안하고 고맙고 감동스럽고 만감이 교차했다. 피곤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완전 쌩쌩하단다. 표정을 보니 정말 산삼이라도 복용한 것 처럼 기운이 넘치는 얼굴이다. 비결이 뭡니까... 나만 맨날 피곤하지...
짐을 다 싸놓고 보니 일년만에 내 살림이 이렇게나 많아졌나 싶어서 좀 놀랬다. 코딱지만한 스튜디오에서 웬 짐이 이렇게나 많이 나오는지. 어디가서 이제 미니멀리스트라고 말하면 안되겠다.
우리는 금요일 밤부터 이삿짐을 새 집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딱 두번을 날랐을 뿐인데 한 겨울에 땀이 뻘뻘 흐르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이사 전 마지막 아침 식사를 차려먹었다. 이 와중에도 버거씨는 몸에 좋다며 석류를 챙겨와서 알알이 까는 정성을ㅋ
버거씨가 사다준 영양제도 하나씩 챙겨먹고 다시 이사 시작-
사실 침대가 제일 큰 문제였는데 버거씨는 내가 아침 먹은 테이블을 정리하는 동안 혼자서 침대를 옮겨다 놓았다. 혼자 가면 현관문을 누가 열어주냐고 같이 가자고 소리쳤지만 혼자서 할 수 있다면서 그냥 나가버렸다. 니스에서 본 커플도 둘이서 그 고생을 했는데 버거씨 혼자 대체 어떻게 갖다놨는지 모르겠다. (아마 내가 길에서 챙피해 할까봐 혼자 다녀온것 같다 ㅋㅋㅋ)
소파형 침대라 다행히 접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혼자 옮기기는 아주 힘들었을것 같다. (당분간만 쓰다가 곧 제대로 된 침대를 사기로 했다.)
열심히 둘이 짐을 다 옮기고 나니 벌써 오후 2시였다.
나가서 사먹을 정신이 없을것 같아서 내가 미리 카레를 만들어놓길 정말 잘한것 같다.
테이블 조립이 덜 끝나서 대충 아무데나 올려놓고 앉아서 먹었다.
한국식 카레라이스 위에다 계란후라이도 얹었다. 깍두기는 맵다고 해서 나만 먹음-
버거씨는 굉장히 맛있어했다. 무엇보다도 배고플때 내가 금방 점심을 뚝딱 만들어서 나오니까 제일 반가워했던것 같다. 스피드가 생명이쥐-
우여곡절끝에 집 상태 점검도 마쳤고 한 달안에 보증금을 돌려줄거라는 약속도 받았다. 휴... 번갯불에 콩 볶듯 많은 일들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오늘 저녁은 내가 살게!"
올드타운 어느 분위기 좋은 바에서 우리는 맥주도 마시고 푸짐하게 안주를 주문했다.
그렇게 걱정했던 일들이 다 해결되었네?! 진짜 해결된 게 맞나? 기분이 얼떨떨하다.
버거씨는 진심으로 기뻐보였다.
"이보다 일이 더 잘 풀릴수는 없을거야. 보통 이사할때는 날짜 맞추기가 힘들어서 보름정도 어느 한 쪽에 집세를 더 내는게 일반적이거든. 근데 갑자기 중개인이 커뮤니케이션을 도와주면서 집상태 점검일을 최대한 빨리 잡을 수가 있었고 결론적으로 어느쪽에도 추가 요금을 낼 필요가 없었어. 새 집주인이 열쇠를 미리 준 덕분에 페인트칠도 미리 할 수 있었고 심지어 새 집은 월세도 훨씬 저렴한데 보증금을 요구하지도 않아! 이렇게 딱딱 맞춰서 이사하기 쉽지 않은데 진짜 운이 엄청 좋은거야!"
그 말을 듣고보니 정말 그러네.
이사 할때도 힘 센 버거씨 덕분에 트럭을 대여할 필요도 없어서 또 아꼈고 말이다.
"이게 다 당신 덕분이지."
"나를 믿어줘서 고마워. 내가 말했잖아. 너랑 내가 함께면 이 세상이 우리의 것이라고."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지하게 말하니까 더 웃기잖아ㅋㅋㅋ
진심으로 후련하게 잔을 부딪혔다.
코딱지만한 새 아파트에는 이삿짐이 한 그득인데 그건 또 언제 다 푸나... 뭐 천천히 하지 뭐. 스트레스 사양이다.
그래도 이사라는 큰 산을 넘었다. 휴우... 이제서야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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