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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연애결혼

7년전 발렌타인, 그날의 진실.

by 낭시댁 2021. 2. 18.

발렌타인데이였던 지난 14일 저녁, 우리는 시어머니께서 사다주신 툴루즈 소시지를 구워먹었다. 

태국에 살때 자서방은 이 두툼한 소세지를 사다가 렌틸콩과 함께 오래오래 푸욱 익힌 요리를 만들곤 했다. 

종이 포장을 펼치자 드러난 묵직한 한줄- 

 

 

소시스 드 툴루즈 (Saucisses de Toulouse)- 

자서방은 이걸 딱 반반 잘랐다.

"난 다 못먹을거같은데..."

"아니야. 이건 맛있어서 다 먹을수 있어." 

굽는건 자서방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으니 나는 옆에서 퓨레나 만들어야겠네~

 

 

자서방은 모든 소시지 종류를 구울때 가장먼저 포크로 구멍을 내 준다. 구멍을 안내면 육즙이 유지되니 맛은 더 좋을 것 같긴한데 소시지속 돼지고기에는 지방이 너무 많아서 구워지면서 구멍속으로 기름이 줄줄 나온다. 

그리고 이 놈은 너무 두툼하니 시어머니께서 시키신 대로 물을 좀 부워서 구멍송송 낸 소시지를 넣고 두껑을 덮고 약한 불에 먼저 익혔다. 보글보글 끓을때 두껑을 열면 물이 순식간데 쫄아든다. 물이 다 쫄기전에 아주 약한 불로 바꿔서 노릿노릿 구워냈다. 

 

 

내가 만든 퓨레는-

당근이랑 전날 먹고 남은 구운감자까지 한데 넣었더니 맛은 더 좋은데 비쥬얼이 그다지...ㅎㅎ 

자서방은 퓨레에 샐러리 뿌리를 넣는걸 좋아하는데 커다란 샐러리 뿌리를 한덩어리(!) 사 놓으면 퓨레를 맨날 해 먹는게 아니라 좀 애물단지가 되곤 하는데 냉동 샐러리뿌리를 사다 먹으니 너무 편하다! 역시 프랑스에 와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저렴하고 다양한 냉동야채들! (샐러리 뿌리와 냉동 버섯을 가장 애용하지만 왠만한 야채들은 신선한걸 선호하긴 한다.)

 

 

이날을 위해 아껴뒀다며 와인 한병을 꺼내오면서 자서방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에게 말했다. 

"내사랑, 나의 발렁띤이 되어 주겠습니까~?"

발렌타인이 프랑스 발음으로 발렁띤인가보다. 

"그래, 그럼 당신은 나의 발렁띤이야."

"아, 남자는 발렁땅, 여자는 발렁띤. 나는 너의 발렁땅이 돼 줄게." 

아... 쓸대없이 세상 모든것에 성별을 구분하는 프랑스어...

 

 

맛은 뭐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래도 나는 절반만 먹어도 배가 불렀고 나머지는 자서방 접시에 덜어주었다. 

소시지와 퓨레, 와인까지 너무 완벽하다며 행복한 얼굴로 음미하던 자서방이 갑자기 물었다. 

"우리의 첫 발렌타인 기억나?" 

"파타야 여행갔던거? 그때 완전 좋았지... 그날 낮에 풀장에서 내 튜브 밀어주면서 처음으로 나한테 사랑한다고 고백하더니 그날 저녁에는 내앞에 무릎을 꿇고 조그만 상자를 줘서 벌써 청혼반지 주는줄 알고 깜짝 놀랬었잖아.ㅋㅋㅋ" 

"아, 그거 아이팟이었어. 짐에서 운동할때 쓰라고. 상자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겠다. 암튼 나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빨리 사랑에 빠질줄은 정말 몰랐어. 지금도 생각하면 모두 기적같아...
아, 발렌타인이 평일이라 주말에 미리 발렌타인 여행을 갔었지만 사실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이 발렌타인이었지. 그날도 기억나?" 

7년전 발렌타인 당일 우리는 각자 출근을 했었다. 그런데 자서방은 나름 서프라이즈라며 휴가를 내고 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서 우리 회사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내 뒤를 살금살금 따라오다가 나를 끌어안으며 깜짝 놀래켰다. 그리고 우리는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러 갔었다. 

"그때 와이프 진짜 웃겼어. 내가 뒤로 살금살금 따라가다가 뒤에서 확 끌어안으니까 끼약~! 하면서 이렇게 놀랬잖아! 표정이 진짜 심하게 놀랬더라고! 하하하" 

자서방은 신이나서 당시 내 표정과 목소리를 흉내내며 웃었다.

".........사실은 말이야...... 내가 그날의 진실을 알려줄게...." 

"?! 아니, 말하지마. 말 안해줘도 돼." 

"나... 사실 그날 나오면서 당신 봤어. 커피숍에 앉아있던거..."

"아니야. 거짓말이야. 그럴리가 없어. 아아아아앙" 

급기야 자서방은 양쪽 귀를 손으로 틀어막고 입으로 소리를 내며 내 말을 듣는걸 거부했다. 진짜로 안믿는건지 믿고싶지 않은건지 모르겠지만...

"그래. 그냥 당신이 좋은대로 하자. 난 그날 아무것도 몰랐던 걸로." 

 

[2014년 2월 14일. 자서방에게 끝까지 말하지 못한 그날의 진실]

그날 나는 퇴근하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내내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그날 자서방은 오후에 출근을 했고 저녁에도 볼일이 없는게 확실한데도 꼭 밑에 와 있을것만 같은 기분이 자꾸 들었던 것이다. 1층에서 출입카드를 찍으려는 순간 맞은편 커피숍에 앉아있는 자서방이 딱 보였고 나는 후다닥 뒤를 돌아 화장실로 달려가서 거울을 보며 기름낀(?) 얼굴을 뽀송하게 공사를 하고 입술에도 생기를 좀 넣은 후 태연하게 다시 걸어나왔다. 그리고 그 커피숍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은채 앞만 보며 서둘러 그 앞을 지나쳤고, 곧 내 뒤로 커다란 그림자가 따라오는것도 다 보고 있었다. 그 후 결정적인 순간에 내 짧은 연기경력을 살려서 끼약~! 하고 뒤로 넘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사실 자서방의 모습을 발견하고 화장실로 달려갈때 이미 내 심장은 터질것 처럼 쿵쾅거리고 있었으니 서프라이즈가 제대로 먹힌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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