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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프랑스 시월드

경상도식 배추적과 프랑스식 엔다이브 파이

by 낭시댁 2022. 2. 14.

시어머니께서 사다주셨던 배추 한통-

주말에는 그걸로 김치를 만들려고 했는데 한장 두장씩 매일 뜯어먹다보니 어느새 홀쭉해져버렸다.


김치가 아닌 배추의 달달한 맛을 참으로 꽤 오랜만에 느낀것 같다. 그냥 김치는 포기하고 다양한 요리로 즐기기로 했다.

한번은 남은 잡채와 닭튀김으로 덮밥을 만들어 보았는데 달달한 배추의 맛이 우러나서 너무너무 맛있었다! 그 다음부터 특별한 재료 없이도 배추 계란 덮밥을 자주 먹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는 아주 오랜만에 배추적을 만들어 먹었다.
언니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친정에서의 설연휴가 어땠는지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먹고싶어졌던것이다.

경상도식 배추적- (표준어는 배추전이지만 나에게는 영원히 배추적이다.)

종가집에 시집오신 우리 엄마는 매년 십수번의 제사를 도맡으셨고 그 덕에 나는 아주 어릴때부터 엄마를 도와드리다보니 경상도 제사의 꽃(?)인 이 배추적의 자칭달인이 되었다.

어릴적 제사를 준비할 때마다 우리 언니는 배추적은 어렵다며 피했지만 나는 배추적만 도맡아서 구울만큼 배추적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항상 내가 나중에 시집가면 배추적만으로도 시댁에서 이쁨을 받을거라고 하셨건만 결국... 배추적 스킬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머나먼 불란서에서 결혼생활을 하게 될 줄이야줄이야...

쌩쌩한 배추 줄기는 대충 뚝뚝 꺽어서 이파리 부분에 반죽물을 살짝 뭍힌 후 달궈진 팬에 세장쯤 깔아준다. 반죽물로 배추들을 서로 이어주다보면 굵은 배추 줄기는 점점 숨이 죽고, 팬을 휘리릭 폼나게 휘둘러서 전을 뒤집어준 후에 한번 더 반죽물로 사이사이를 메꿔준다.

부침가루가 없으니 대충 튀김가루와 밀가루를 묽게 게어서 썼다. 사실 밀가루로만 해도 맛있음-

지글지글 맛있는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배추적을 보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설날에 엄마 혼자 배추적을 구우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엄마 뿐 아니라 언니도 이 배추적을 보면서 내 생각이 많이 났겠구나... 나도 배추적을 굽는데 엄마랑 언니생각밖에 안나는데...

두장을 굽고 양념장도 만들었다. 집간장이 없으니 아쉬운대로 양조간장에 마늘가루와 고춧가루 그리고 물도 살짝 섞었다.

전은 찢어먹는게 맛이라지만 나는 배추적만큼은 배추와 반죽이 분리되지 않게 큼직하게 잘라서 한입 가득 먹는걸 더 좋아한다.

딱 하나를 맛보았는데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졌다. 😍

결국 시어머니께 메세지를 보낸 후, 접시채 호일에 싸서 시댁으로 가져갔다. 이런건 혼자 먹으면 반칙이니까... 막걸리가 아쉽네... 😭

마침 만들고보니 얼마전 시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엔다이브 파이가 이 배추적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엔다이브는 시어머니 발음으로 엉디브- 살짝 쓴맛이 나긴하지만 식감도 모양도 배추와 매우 흡사하다.

시어머니께서는 언젠가 이 엔다이브를 팬에다 구우신 후 그 위에 시트지를 덮으셨고 그대로 오븐에 구우셨다.

파이의 고소함과 엉디브의 식감이 너무나 잘 조화되는 맛이었다. (자서방은 별로라고 했지만-) 이걸 처음 봤을때도 나는 배추적을 떠올렸었다. 냄새도 뭔가 흡사하고...

시댁에 배추적을 한접시 갖다드시고는 어머님의 엉디브 파이와 꽤 비슷한 느낌이 나실 것 같다는 말씀도 전해드렸다.
부디 두분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다.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두장을 새로 부쳐서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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