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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새출발

길에서 낯선 할머니의 손을 잡아드렸다.

by 요용 🌈 2024. 7. 19.

지난 2월. 이사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였다. 

최대한 미니멀 라이프로 살겠다고 다짐했건만 필요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리들에서 멀티탭을 하나 구입했는데 사흘만에 고장이 났다. 힝... 역시 싼게 비지떡인가. 

그냥 새로 살까 하다가 용기내서 교환하러 가 보기로 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저녁을 일찍먹고 리들로 걸어가는 길. 날씨는 한겨울처럼 여전히 쌀쌀했다. 

리들가서 멀티탭 교환하는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이 된단 말인가. 비장하게 걸어가는 길, 행운을 빌며, 길가에 구걸하는 아저씨한테 동전을 드렸다. 

요즘은 왠지 구걸하는 사람들한테 동전을 더 후하게 건네게 된다. 예전에도 하는 일이 자꾸 꼬이고 잘 안될때는 (큰 금액은 아니지만)기부를 하곤 했다. 오늘 멀티탭 교환 잘 하게 해주세요...

 

얼마 후 시장 앞 넓은 광장을 지날때였는데 왜소한 할머니 한 분이 한복판에 서서 길가는 행인들을 향해 이리 저리 손을 내밀고 계셨다. 구걸하는 모습은 아니었는데 행인들은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할머니의 시선을 외면한 채 저마다의 발걸음을 제촉했다. 나는 할머니쪽으로 다가갔고 할머니께서는 손을 잡아달라는듯 손을 나에게로 뻗으셨다. 간절한 표정으로.

 

"손 좀 잡아줘요."

 

잘못들었나 싶어 머뭇거렸는데 할머니께서 한번 더 말씀하셨다. 

 

"나 여기 내려서고 싶은데 혼자서는 못해요. 손 좀 잡아줘요..." 

 

나는 얼른 손을 잡아드렸다.

할머니의 손은 앙상했고 뼈와 가죽이 따로따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왜소한 체격이라 온 체중을 나에게 다 실으셨을텐데도 가볍게만 느껴졌다. 나를 가장 당황스럽게 한 점은, 할머니가 내려서려고 했던 도로턱은 고작 10cm정도밖에 안되었다!

할머니는 반대쪽 손에 야채가 담긴 장바구니를 들고 계셨는데 내가 도와드리겠다고 손을 내밀었더니, 괜찮다고 하시며 도로턱만 한 발 내려서신 후 나에게 인사를 하시고 느린 걸음으로 사라지셨다.

 

할머니의 뒷모습을 나는 한동안 바라보고 서있었다. 여운이 꽤 오래갔다.

나이가 든다는 건 저런거구나... 서러운거구나... 

할머니의 앙상한 손과 너무도 가벼웠던 체중의 느낌이 사라지지를 않았다. 할머니는 무거운 장바구니까지 들고 거기서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 서계셨던걸까. 외면하는 행인들을 보며 야속하셨겠지. 한때는 할머니도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였겠지. 지금은 누군가의 어머니이자 사랑받는 아내, 존경받는 어느 집안의 어르신일 수도 있는데 오늘은 추운 시내 한복판에서 무력하게 서 계셨다. 고작 10cm 도로턱을 혼자 못 내려가셔서 말이다.

 

나도 저렇게 되겠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그런 날이 올 지도 모른다. 

 

내가 저 나이가 되었을땐 누가 내 곁에 있을까. 

저렇게 장을 봐서 집에 돌아갔을 때 내 요리를 맛있게 먹어줄 가족이 나는 있을것인가. 

추운 저녁, 손 잡아줄 사람이 없어서 애처롭게 길 한복판에서 막막한 심정으로 서 있었다고 말해주면 속상해하며 나를 안아줄 가족이 있으려나. 

 

내 상상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계속 이어졌다. 

 

할머니는 곧 온기가 가득한 집으로 돌아가시겠지. 할머니가 늦어져서 걱정하고 계시던 할아버지는 현관으로 달려나와서 할머니를 맞아줄거야. 할머니는 오늘 그 동양인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더 늦었을지 모르겠다며 웃으며 말씀하시고 할아버지는 다음부터는 장보러 갈 때 함께 나가자고 하시며 할머니의 손을 따뜻한 벽난로곁으로 이끌어주실거야. 

 

딱 내가 원했던 노년의 모습을 방금전에 만났던 할머니의 모습에 입혀보고 있었다. 

 

아 또 감정적이 되려고한다. 이러지말자. 

 

 

리들에 갔다가 잘생긴 젊은 남자직원에게 멀티탭을 보여주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친절하고 신속하게 새 물건으로 교환해 주었다. 오늘 내가 작은 선행을 한 보람이 있는것인가. 

 

새 멀티탭을 교환받고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 버거씨에게 전화를 걸어서 오늘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버거씨는 여전히 사무실에서 늦도록 일처리를 마치고 있는 상태였는데 내 전화를 반갑게 받아주었다. 

 

"나이가 든다는 건 그런건가봐... 우리는 오래오래 건강하고 젊게 살것 같이 굴지만 우리 인생은 사실 엄청 짧잖아. 그 할머니도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면 바로 어제같았다고 하겠지. 고작 10cm 도로턱을 혼자서 못내려올 날이 올거라는 생각은 못했을거야... 좀 울적해." 

 

"나는 지금까지 일만 하면서 앞만보며 살아왔던것 같아. 이제부터는 다르게 살거야. 널 만나고부터 나의 우선순위가 다 바뀌었어. 가볍고 단순하게 그리고 많이 웃으면서 살거야."

 

내가 자주 하는 말을 버거씨가 외워버렸네. 

그래 가볍고 단순하게 지금 이순간 최선을 다해서 많이 웃고 행복해야지. 

80대가 되었을때 나는 오늘의 다짐을 떠올리며 후회없이 실컷 웃으며 살았다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