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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새출발

성 패트릭데이 그리고 투머치 토커

by 요용 🌈 2024.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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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중순의 어느 날. 에리카가 주말에 함께 바에 가자고 메세지를 보내왔다. 
 
[이번 주말이 성 패트릭이거든! 작년에 너 못왔었잖아. 올해는 꼭 같이 가야해! 남친도 데려와!]
 
나는 성 패트릭이 무슨 날인지도 몰랐는데 검색해 보니까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한 수호성인 패트릭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냥 초록색 옷을 입고 술마시는 날...;; 
 
완전 외향형인 우리 버거오빠는 재미있겠다며 신이났다. 성 패트릭보다도 내 친구들을 처음으로 소개받는 자리라 들뜬것 같았다. 정말 제대로 외향형이다. 
 
우리 커플은 나름 초록색 옷을 입고 (서랍에 고이 모셔둔 큼직한 플라스틱 초록 귀고리가 빛을 발하는 날이 왔다!!) 약속장소인 맥카티(아이리시 펍)에 손을 잡고 들어갔더니 미리 와 있던 친구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너 얼굴에서 빛이 나! 이게 사랑의 힘인가?"
 
내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그 말을 들은 우리 버거오빠가 나보다 더 좋아했다.
 
에리카와 알마, 마이크등등 내 친구들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눈 우리 버거씨는 술을 가지러 바에 가는 알마를 따라서 일어났다. 
 
"넌 앉아있어, 내가 갖다줄게. 붉은 맥주 맞지?" 
 
마이크가 에리카를 위해 심부름을 하는걸 볼때마다 조금 부러웠는데 살다보니 나에게도 이런날이 오는구나. 
 
같이 프랑스어를 공부했던 반 친구들과 그들의 친구들이 계속해서 도착했다. 특히 이란인 친구들이 한 무더기(?)였다.
 
"이란인들! 너네는 꼭 그렇게 몰려다니더라."
 
"맞아! 담배 필때도 같이 가고 화장실도 같이 가고!"
 
"맞아, 심지어 수업에 지각할때도 같이 들어오잖아ㅋㅋ"
 
우리가 놀렸더니 이란애들도 따라 웃으면서 그 말이 맞단다ㅋㅋ 
 
잠시 후 버거씨가 맥주를 들고 돌아왔을때 우리 테이블은 이미 북적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펍에서 초록색 스카프를 나눠주었고 우리는 머리나 목에다 둘렀다. 오랜만에 너무 즐거운 밤이었다. 
 
알마나 에리카는 자주 만났지만 오랜만에 만난 다른 친구들은 나에게 계속해서 안부를 물어왔다. 그래 내가 그동안 뜸하긴 했지. 길고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나왔으니까...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별일 없었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들에게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일 많았지! 나 별거해! 이혼하기로 했어!" 
 
내 대답에 당황한 친구들의 눈동자들이 갈곳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는 내 옆에 헤맑게 앉아있는 버거오빠의 눈치를 일제히 살피며 대답할 말을 못찾고들 있었다. 친구들은 버거오빠가 내 남편인줄로 알고 인사를 나누었던 것이다. 
 
"아 이 사람? 남편 아니야ㅋㅋㅋ" 
 
버거오빠를 포함해서 알마, 에리카와 나는 그 친구들의 반응에 웃겨서 미친듯이 웃었다. 그 친구들은 정말 따라 웃어도 되나 싶은 표정으로 애써 웃었다. 괜찮아. 웃어도 돼ㅋㅋ
 

 
버거씨는 맞은편에 누가 앉아있건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문제는 말이 너어무 많아서 상대가 안쓰러워 보일지경이었다는 점.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알마와 에리카가 미친듯이 웃었다. 
 
"내가 말했지? 말 진짜 많다고... 쟤 어쩌냐..." 
 
"저 여자애는 지금 버거가 무슨 말 하는지 반도 못알아듣고 있어. 쟤 프랑스어 초급반이거든." 
 
"ㅋㅋㅋ 쟤는 오늘 예쁘게 차려입고 파티에 나올때 이런 걸 기대하며 나오진 않았을텐데 ㅋㅋㅋㅋ" 
 
우리는 그녀를 딱하게 여기면서도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근데 버거 진짜 좋은 사람같아. 막상 만나보니까 알겠어. 분명 책도 많이 읽나봐. 내 분야가 미생물학이라고 했더니 카자흐스탄 치즈 얘기를 하면서 박테리아 얘기를 하더라? 일반사람들은 잘 모르는 전문 용어들을 먼저 말하는걸 보고 깜짝 놀랐어."
 
오 우리오빠 좀 자랑스럽네? 
 
알마는 자세를 고쳐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행복해 보여서 나는 정말 기뻐. 너는 이제 무조건 너를 넘버원으로 대해주는 남자를 만나야 해." 
 
"스테판은 딸이 둘이 있는데도 네가 넘버원이래?"
 
"당연하지! 스테판에게 나는 무조건 최우선 순위야. 난 그걸 항상 느끼며 살아. 어차피 딸들은 다 성인이고 독립했으니 아빠한테 의지하면 안된다고 항상 강조하지. 버거씨도 큰 아들은 이미 성인이라며. 둘째는 15살이니까 머지않아 성인이 될거고..." 
 
"잠깐만, 벌써 버거씨에 대해 모르는게 없네? 언제 그렇게나 길게 대화한거야?" 
 
"응, 아까 바에서 같이 술 주문하는 잠깐동안 계속 계속 말하더라ㅋㅋㅋㅋ" 
 
앜ㅋㅋㅋ 오라버니...
 

 
이날 우리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같이 어울려 술도 마시고 춤도 추고 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DJ가 70년대 음악부터 현대음악까지 거슬로 올라오면서 음악을 선곡했는데 나는 2000년대 초반 음악이 나올때 흥이 폭발했다. 한참 필리핀에서 가무를 즐기던 나의 20대 시절이 떠올라서 에리카랑 둘이서 음악에 재대로 몸을 맡겼다. 그 이후부터 버거씨는 나를 마이클 잭슨이라고 부른다ㅋㅋㅋㅋㅋ
 

 
버거씨는 내 친구들에게 다음에 자기네 집에 놀러오라고 초대를 했다. 테라스에서 바베큐 파티도 하고 룩셈부르크도 구경시켜 주겠다면서. 
 
그리고 이날 너무 좋은 시간을 보냈다며 다음에는 자기 친구들도 꼭 같이 만나자고 몇번이나 말했다. 
 
살다보니 이런 날도 오네. 
 
 
 
**덧붙임
 
며칠 후 다시 만난 알마가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곰곰히 생각을 해 봤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남자가 말이 많은건 단점 보다는 장점이 더 많은것 같아." 
 
앜ㅋㅋ 왜 그런 생각을 곰곰히 하는건데ㅋㅋㅋ 
 
"나이들어 외출할 기운도 없을때 한 집에서 과묵한 남자랑 단둘이 사는게 좋을까 말 많은 남자랑 사는게 좋을까? 난 후자가 낫다고 봐. 내 남편이 말이 좀만 더 많았어도 내 프랑스어가 훨씬 빨리 늘었을거야!" 
 
"야 너무 앞서가는거 아니니ㅎㅎㅎ"

"아무튼 버거씨는 좋은 사람같더라는거지." 
 
그래 그건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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