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거씨가 낭시로 찾아온 주말이었다.
생각같아선 버거씨한테 맛있는 요리를 실컷 만들어 주고 싶은데 부엌이 너무 좁아서 뭔가를 시도하기가 어렵다. 어차피 둘 다 늦게 일어나서 (일찍 일어났는데 아침부터 수다를 떠느라 시간 가는줄을 몰랐음) 아침 식사 대신에 이른 점심을 먹기로 하고 외출을 했다.
스타니슬라스 광장 근처에 있는 아시아 식당으로 갔다.
술먹은 다음날엔 뜨끈한 국물이 최고 아니던가. 소고기 국수를 주문한 나와 다르게 버거씨는 보분을 시켰다. (우리나라에서는 이걸 분짜라 부르는거 같은데). 내가 국물을 한모금 마시고 크읔- 하고 있을때 버거씨는 보분위에 있던 넴을 하나 입에 넣고서 으음!하면 감탄을 했다. 이 집은 우리가 다섯손가락 안에 꼽는 단골 식당이다.
밥을 먹으면서 오늘은 무얼할까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내가 2만보를 걷겠다고 다짐을 했더니 버거씨는 화색을 띠며 무조건 찬성했다.
든든하고 뜨끈하게 배를 채운 후 강변을 따라 걸었다. 아직 여름이 한창이던 시기였지만 한국만큼 더운 날씨는 아니었을것이다.
자주 함께 걷던 강변길이지만 오늘은 더 멀리까지 가 보았다. 버거씨는 낭시에 이렇게나 좋은 곳이 있었다는걸 이제야 알았다며 여러번 감탄했다.
"내가 낭시가 아름다운 도시라고 말할 때 마다 내 동료들은 낭시에 별로 볼 게 없지 않냐는 식으로 말했거든. 특히 스트라스부르나 메츠랑 비교했을때 낭시에는 예쁜 강이 없지 않냐고도 말했는데 이렇게 멋진 강이 있었네!"
음 진작에 데려올 걸 그랬나.
평소에 가던 강변 말고 오늘은 좀 더 멀리 돌아서 강 맞은편까지 가 보았다. 나도 여기까지는 처음 와보네.
마치 바닷가 해변처럼 이곳에는 야외 펍들이 대낮에도 큰 음악소리를 내며 활기를 띠고 있었다.
저 뒤쪽으로는 야외 수영장이 있었는데 아이들 풀장도 따로 있고 사람들이 엄청 붐비고 있었다. 완전 별천지다.
벌써 만보 가까이 걸었온 우리는 편한 소파를 찾아서 털썩 주저 앉았다.
음료는 직접 바에 가서 주문을 해야 한대서 내가 귀찮다고 했더니 에너자이저 우리 버거씨가 걱정말라고 자기가 다녀올테니 마시고 싶은걸 고르라고 했다. 아 이런 호강을 내가 못받아봐서ㅋㅋㅋ 사소한데서 큰 기쁨을 느끼는 나다.
버거씨는 모히토를, 나는 무알콜 피나콜라다를 골랐다. 버거씨한테 한모금 마시라고 권했더니 피나 콜라다 한모금에 눈을 번쩍 뜨는 버거씨. 세상에 이런 맛있는게 다 있냐는 표정이다. 나처럼 사소한데서 행복을 찾는 사람이라서 참 좋다.
이 근처에 사는 동생 M이 안그래도 생각나려던 참이었는데 귀신같이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녀는 나한테 부탁할게 있었는데 마침 내가 근처에 있다고 했더니 너무 좋아하며 바로 달려나왔다. 그리고 할 말을 급하게 쏟아낸 그녀가 다시 떠날때는 우리더러 저 선착장에서 보트를 꼭 타보라고 당부했다.
"그냥 저기 서 있으면 태워줘요. 호수 한바퀴 도는데 짧지만 재미있어요. 저는 벌써 몇 번이나 탔어요."
아 고뤠? 그럼 또 타줘야지.
하지만 우리가 갔을땐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다 더워서 땡볕에 서있기가 힘들었다.
선착장에서 마침 블랙핑크의 노랫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뭔가 싶어서 돌아봤더니 젊은 학생들이 스피커를 갖다놓고 블랙핑크 노래를 큰 소리로 따라 부르고 있었다.
"블랙핑크 알아?"
우리 버거씨는 당연히 모른다. 블랙핑크 노래가 들려올때마다 똑같은걸 물어보지만 버거씨한테는 너무 어려운 K팝이다.
꼬맹이가 재롱을 피우는걸 사람들이 흐뭇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솔직히 이 머나먼 타국에서 우리말로 된 k팝을 큰 소리로 따라 부르는 프랑스 청년들을 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자 이제는 시내로 다시 돌아갈 시간.
강변을 따라 걷다가 페피니에 공원을 가로 지르는데 피크닉을 나온 사람들로 공원이 붐비고 있었다.
"아 이런 여름의 에너지 너무 좋아. 활기가 느껴지지않아? 사람들 표정도 너무 행복해보여. 나도 그 중의 한사람이지."
버거씨도 미소띤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원 어딘가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서 가 보니 한 그룹의 무희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댄스학원에서 나온건가 싶었다. 다들 춤 솜씨가 좋았다. 그때 버거씨가 껄껄 웃으며 오른쪽에 남자가 한 명 껴있다고 말했다.
과연 중년남자가 한 명 껴 있었네?
애석하게도 아저씨는 동작을 잘 따라가질 못하는 중이었는데 최선을 다해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것은 느껴졌다.
즐거운 표정만큼은 프로페셔널 했다. 저렇게 청일점으로 껴 있으면 여자들이 참 잘해줄것 같다ㅋ
스타니슬라스 광장에서도 여름 오후의 활기가 뜨거웠다.
이대로 들어가긴 아쉬워서 나는 집에가서 돗자리를 챙겨와서 페피니에 공원에 피크닉을 가자고 말했다.
공원 근처에 있는 피자집에 들러서 화덕피자랑 샐러드도 포장했다.
포장을 기다리며 직원들이 피자를 만들고 굽는 모습을 구경했는데 이곳에서도 우리 버거씨는 친화력을 뽐내며 직원들과 수다를 떨었다. 직원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말이다.
피자는 정말 맛있었다! 음료수도 마시고 샐러드랑 복숭아도 먹고나서 잠깐 누워서 책도 읽었다.
시간이 후딱 가는구나.
"그래서 우리 이만보 달성한거야?"
버거씨의 물음에 폰을 확인해 보니 살짝 모자란다.
저녁공기가 차가워지기 시작했으므로 우리는 벌떡 일어나서 이만보를 채우며 시내를 산책했다.
다음날 룩셈부르크로 출근해야 하는 버거씨를 떠나보내고 혼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뜨겁고 길었던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뭔가 울적한 마음이 들려던 찰라.
내 방문 앞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무수하게 반짝였다.
방앞에 전등이 없어 어둡다고 맨날 불평했는데 하늘에 별이 잘 보인다는 장점이 있었군. 미쳐 올려다볼 생각을 한 적이 없으니 머리위에 별이 반짝이는 지 조차 모르고 살았다.
[이것 좀 봐, 별이 참 많아!]
버거씨에게 사진을 보내줬더니 운전중이라 바쁠줄 알았던 버거씨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
[그래도 나한테 가장 빛나는 별은 너야.]
아 오글거리는데 좋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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