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엘리야는 16살이다. 내 친구 중 가장 어린 친구.
작년에 우리 가게에 무작정 찾아와서 인턴을 시켜달라고 조르던 이 친구를(이때는 심지어 15살이었네) 우리는 안쓰려고 했는데 파리에서 전학온지 얼마 안돼서 친구가 없다는 말에 마음이 약해진 SK가 2주간 인턴으로 고용시켜주었다. 일이 끝난 후에도 수업이 끝나면 허구헌날 찾아오던 이 소년의 엄마는 (알고보니 나랑 동갑이란다) 아들과 대화 상대가 되어줘서 우리더러 고맙다고 말했다.
며칠 전 엘리야가 엄마랑 같이 우리 가게에 밥을 먹으러 왔다. 평소처럼 나는 똑같이 엘리야를 놀리면서 장난쳤다. (여성 성향이 강해서 좀 섬세하지만 나는 그냥 소년으로 대한다.)
밥을 다 먹고나서 떠나기 전 엘리야는 주말에 뭐하냐고 나더러 놀자고 했다.
나 남자친구보러 티옹빌 가는데-
실망한 엘리야를 보던 소년의 엄마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가 요즘 학교에서 일이 좀 있어서..."
"엥? 너 지난주에 나더러 만나자고 했던거 혹시 그거 때문이었냐?"
엘리야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때도 버거씨랑 노느라 바쁘다고 거절했는데. (사실 16살짜리가 엄마 나이인 나더러 허구헌날 놀자고 하는것도 웃긴거 아닌가ㅋ)
"아 그래? 그럼 알았어. 내가 바빠도 시간을 내야지. 오늘 저녁 때 볼까? 아무때나 말해."
그랬더니 엘리야가 표정이 환해졌다.
"일요일은 안 돼?"
엘리야 엄마는 나더러 집에 와서 둘이 놀으란다.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싶기도 했지만 일단 장소는 생각해보자고 말했다.
결국 우리는 월요일날 보기로 했다.
너 학교 끝나면 카톡 줘.
(엘리야는 카톡을 한다. 귀찮게 할 거같아서 아이디 알려달라고 할 때마다 요리조리 피했는데 결국 이렇게 카톡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월요일이 되었을때 수업을 마친 엘리야는 자기네 집으로 오라고 했다. 자기가 갸또를 구워주겠단다.
야 그냥 우리 맥도날드 가자!
내 말에 엘리야는 맥도날드랑 버거킹은 보이콧을 해서 안되고 KFC에서 보잔다. 하여간 복잡한 녀석이다.

그렇게 나는 월요일 저녁 나의 최연소 친구랑 KFC에서 햄버거를 먹었다.

"어우야 이거 뭐냐? 메가박스 5.5유로래! 너도 이거 먹어, 내가 사줄게. 비싼거 먹을거면 안사준다."
햄버거, 감자칩, 양파링, 콜라 그리고 아이스크림까지 다섯가지가 5유로였다! 저기서 감자칩은 1.5유로 더 주고 베이컨 치즈 웻지로 바꿨다.
가격이 정말 너그럽군.
"너도 웻지감자로 업그레이드 해 주마. 대신 딴거는 안사줄거야."
자기꺼는 자기가 내겠다고 우기던 녀석이 내 말을 듣고는 웃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야 나 이뽑아서 천천히 먹으니까 너도 천천해 먹어."
내 말에 엘리야는 이미 알고 있으니 걱정 말란다.

아무튼 나는 이 햄버거 세트를 먹으면서 질풍노도의 십대 고민을 열심히 들어주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친구들 모두 자기네 문제들만 떠들뿐이야. 그 누구도 내 안부를 물어봐 주지 않아."
"오구오구 엘리야, 요즘 어때? 잘 지내고있어?"
내가 장난을 치니까 엘리야가 좀 삐친 표정을 짓다가 다시 진지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무튼 나도 내 문제가 많은데 그들의 힘든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느라 나도 지쳐간다는거지."
"야, 내가 지금 하고 있는게 그거잖아."
엘리야가 다시한번 삐죽거리더니 웃었다.
나는 늘 이런식이다. 엘리야가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장난을 치고 가볍게 넘긴다. 엘리야는 왜 맨날 자기만 보면 놀리냐고 하면서도 맨날 나랑 놀자고 한다.
"야 네 얘길 들으니 내 십대가 떠오른다. 그때 나도 너처럼 세상 모든 문제를 다 짊어지고 있는 듯 행동 했던 것 같아. 그걸 듣는 어른들은 속으로 얼마나 웃었을까. 부끄럽군ㅋ"
그래도 엘리야는 꿋꿋하게 본인의 이야기를 쏟아냈고 나는 놀리면서도 다 들어주었다.
"야 인제 가서 아이스크림 달라그래. 나는 카라멜-"
내 말에 엘리야가 쭈뼛거렸다.
"나 어떻게 하는건지 모르는데..."
"그냥 가서 아이스크림 달라그래. 그럼 내가 가리? 나 마흔 세살인데?"
벌떡 일어나서 소심하게 카운터로 걸어가는 소년의 등을 보면서 나는 혼자 웃었다. 이 맛에 내가 너랑 놀지.

6.50유로에 아이스크림도 포함이라니. 다음에 또 와야겠네. 아니 다음에는 맥도날드 가야지.
맥도날드랑 버거킹은 이스라엘을 지지하기때문에 팔레스타인을 위해 보이콧을 한다던 이 소년. 내가 맥도날드가 좋다고 했더니 다음번엔 예외로 같이 가겠단다. 이렇게 쉽게 무너질거면서 보이콧이 웬말이냐고 또 놀려먹었다. 삐죽거리면서도 좋다고 같이 웃는다.
엘리야한테 오늘 들은 말 중에 제일 웃긴 말은 이거였다.
"하... 8살때만 해도 세상은 단순하고 즐겁게만 보였는데..."
나도 십대때 정말 저랬던것 같다.
생각해보니 좀 부끄럽다.
너도 나이들면 오늘의 대화를 떠올리고 혼자 이불킥을 할 날이 올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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