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 트래킹을 하는 날.
미팅 포인트로 가기 위해 아침일찍 버스에 올랐다. 구불구불 아찔한 해안길을 한시간 가량 올라갔더니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이곳은 고도가 높아서 아랫쪽 동네보다 기온이 낮았던 것이다.
우리와 동행하게된 일행들은 중년의 스페인 부부들이었는데 다들 등산스틱, 두꺼운 자켓에 등산화까지 잘 갖춘 모습들이었다. 그에 비해 나만 또 에코백에 자켓도 없고... 나 괜찮겠지...?;;
잠시 후 크록스를 신고 나타나신 가이드 아저씨의 모습에 나는 안도했다. 크록스를 신고 갈 수 있는 지형이면 나도 괜찮을것 같았다.
우리는 승합차를 타고 15분 정도 더 산을 올라가서 트래킹을 시작했다.
열정적이고 유쾌했던 가이드 아저씨는 스페인어로 안내를 하면서 나와 버거씨를 위해 영어로 다시 설명을 해 주셨다. 그러다보니 주로 우리 옆에서 같이 이동하셨고 우리는 궁금한 것들이 떠오를 때마다 편하게 질문을 할 수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저를 잘 따라오셔야 해요. 아무데나 들어가면 안되고요, 이렇게 돌로 표시한 트래킹 선 안에서만 이동이 가능해요. 그리고 쓰레기 투척을 방치하기 위해 음식물 섭취도 안됩니다."
"바나나같은 과일도 먹으면 안돼요...?"
벌써 배가 고팠던 나는 소심한 목소리로 질문했는데...
"네 안돼요. 바나나껍질도 버릴수 없어요."
ㅠ.ㅠ
2021년 12월에 폭발한 화산. 불과 2년 조금 더 지났을 뿐이다.
지정된 구역으로만 다닌 덕분에 (인간의 발자국 흔적이 없이) 화산폭발이후 어떻게 이 죽음의 땅위에 생명력이 되돌아 오는지 그 과정을 더 뚜렷하게 관찰할 수가 있었다.
인간은 안되지만 동물들은 마음껏 다닐 수가 있다. 발자국이 보일때마다 무슨 동물인지 가이드 아저씨가 말해줬는데 토끼나 다람쥐등 작은 동물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이런 신기한 마크들이 많아서 아저씨에게 물어봤더니 수분과 바람 그리고 시간차에 의해 나타난 거라고 하셨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 주변으로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뿌연 미스트가 잔뜩 끼어있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너무 신기해서 동영상을 얼마나 많이 찍었는지 모른다.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와 있는 기분.
얼마간 걷다보니 미스트가 걷혔고 푸른 나무들도 조금씩 나타났다.
걸을때마다 화산모래로 발이 푹푹 들어갔고 일행들의 발걸음 때문에 화산모래가 날려서 좀 힘들었다. 그리고 일행들 가까이 붙을때마다 저 등산스틱때문에 몇번이나 위험했는지... 결국 우리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걸었다.
가이드 아저씨는 바싹마른 화산모래를 끌어다가 라팔마섬의 화산 활동 역사에 대해 설명을 해 주셨다.
"화산 활동을 모니터링 하고 예측하고 있다면 다음번 폭발에 대한 대비도 가능하겠네요?"
질문왕 우리 버거씨가 물었다.
"질문이 잘못 되었어요. 폭발이 또 있을거라는것은 자명한데 문제는 어디서 터지냐예요. 그건 아무도 몰라요. 해저에서 터지거나 1971년 처럼 해변에서 터져서 피해가 미미할 수도 있고요 혹은 도시 한복판에서도 터질 수도 있다는거지요."
자연 재해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고 무력하다. 섬짓해라...
나무야 고생이 많았구나... 살아남아줘서 대견하다.
살아남은 나무들도 멀쩡한 상태는 거의 없었다.
산 정상으로 올라갔더니 아래로 도시의 모습이 펼쳐졌다. 먹구름과 안개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서 아쉬웠다.
우리 정면으로 화산 분화구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분화구에 가까워질 수록 삶은 계란 냄새같은 유황냄새가 (가이드 아저씨는 다르게 표현하셨는데 기억이 안나네)가 진해졌다.
"폭발한 지 벌써 2년이 넘었는데 어떻게 아직도 마그마가 활동하는 냄새가 나지요?"
"저기 한번 보세요."
내 질문에 가이드 아저씨는 분화구 왼쪽을 가리키셨고 그곳에서는 여전히 검은 연기가 두줄기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세상에! 아직도 저기는 타고 있나요?"
"뜨거운 가스가 올라오는거지요.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면 위험해요."
걷다보니 거짓말처럼 하늘의 먹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분화구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까지 당도했다.
이곳에서 가이드 아저씨는 두명씩 앞에 세워놓고 사진을 열심히 찍어주셨다. 1분도 헛으로 허비하지 않겠다는 듯 이리저리 다양한 각도로 익숙하고 신속하게 뛰어다니시는 모습이 모두의 웃음을 자아냈다. 본인의 일에 열정을 다하시는 모습이 정말 멋졌다.
분화구 앞에서 가이드 아저씨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여기 화산 1일차와 87일차의 사진을 비교해 보세요. 이곳은 원래 산이 아니었어요.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이 산은 용암과 화산재가 쌓여서 그 옆의 봉우리보다 더 높이 솟아오른거예요."
우와...
나는 왜 막연히 화산이 산 꼭대기에서 폭발했을거라고 생각을 했던걸까.
이곳은 원래부터 산이 아니었던것이다. 화산은 87일만에 산 봉우리를 하나 만들어냈다.
화산센터에서 봤던 영상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흘러내린 용암은 바다쪽으로 흘러가면서 그 위에 있는 집들을 모조리 삼키고 있었다.
나는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미리 대피했으니 인명피해는 없었던거지요?"
"네, 화산이 터지기 전에는 조짐을 보이기때문에 대피할 시간이 있었지요."
버거씨의 질문이 이어졌다.
"인명피해는 없었더라도 재산피해는 컷겠지요? 정부에서 보상을 해 줬을까요? 아니면 보험처리가 되었나요?"
"안타깝게도 이곳 주민들은 보상을 하나도 못받아요. 보험도 없고요. 대부분 허가없이 아무데나 집을 짓고 살거든요..."
허걱
이런 아름다운곳에 사는 주민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그런 속사정이 있을줄이야.
"그럼 이곳 주민들은 언제 어디서 화산이 터질지도 모르는데 다른 지역으로 떠나지 않고 그냥 살고 있는거예요?"
"네 그런거지요. 저도 외지 출신인데다 이나라 저나라 많이 다녀봤는데 이 섬만큼 아름답고 좋은 곳이 없더라구요. 완벽한 곳은 없으니까요. 스트레스가 쌓일일이 없어요. 도로에서 접촉사고가 나도 누구하나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아요.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사람들이 다들 유순하고 화가 없어요."
결국 우리 두사람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화산 폭발 후 하늘에서 찍은 분화구 사진을 보여주셨는데 분화구가 여러개 있었다. 저렇게 화가난 콧구멍들은 여전히 식식거리듯(?)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분화구를 나는 계속해서 돌아보며 산을 내려왔다.
어마어마한 화산재와 용암을 뿜어내면서 산처럼 그것들이 쌓였고, 무시무시한 용암은 저 아래 해안으로 흘러내려가면서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켰겠지.
살면서 이런 경험을 또 해 볼 수 있을까.
오길 정말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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