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거씨가 꽤 오래전부터 나에게 부탁을 해 온 것이 하나 있었다.
[혹시... 우리집에서 언제 한 번 닭강정 만들어 줄 수 있어?]
본인이 먹고 싶어서 그런게 아니라는걸 나는 처음부터 눈치 챘다. 버거씨는 벌써 우리 가게에서 몇 번이나 먹어봤으니까- 아들들에게 갓 튀긴 닭강정의 '환상적인' 맛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당연히 해 줄건데... 언제하지?
"다음에 넘버투랑 넘버쓰리가 집에 오는 날 만들어 줄게."
버거씨가 나를 넘버원이라고 부르게 된 이후부터 나는 버거씨의 아들들을 넘버투, 넘버쓰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버거씨랑 단 둘이 있을때만. 버거씨는 이 말을 들을때 마다 웃겨 죽는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웃기단다.
아무튼 이번에 넘버투랑 넘버쓰리가 한 집에 모이게 되었기에 나는 드디어 그들에게 따끈한 닭강정을 선보일 기회가 생겼다.
토요일 저녁 버거씨네 집에 도착했을때 버거씨는 필요한 재료들을 미리 장 봐 놓았다며 아이처럼 신이나 있었다.
"닭이 어찌나 신선한지! 주인도 너무 친절했고 덕분에 아주 질 좋은 닭을 사왔어!"
닭을 손질하고 있는 동안 버거씨는 또 닭집주인과의 대화를 들려주느라 정신이 없다. 나는 닭을 자르느라 정신없는데.
내가 또 손이 빠른 편이라 버거씨 수다를 듣는 와중에도 후다닥 닭 손질을 끝내고 식용유를 예열시켰다.
그런데!
튀김 건지라고 주는 집게가 플라스틱이네.
이걸로 어떻게 튀김을 하냐...
난감해하는 내 표정을 보더니 수다스럽던 버거씨 입이 합죽이가 됐다.
서랍이나 찬장을 열심히 뒤지다가 나는 곧 무언가를 발견했다.
퐁듀용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가늘디 가는 쇠 꼬챙이 두개를 젓가락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을 보고 버거씨가 꽤 탄복했다. 내가 또 임기응변에 능함ㅋ (자화자찬에도 능하고.)
내가 닭을 빠른 속도로 튀기는걸 본 버거씨는 서둘러 샐러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윗층에서 게임을 하던 넘버투랑 넘버쓰리가 내려와서 테라스에 테이블을 세팅했다.
치킨은 반반이지-
반은 후라이드 반은 양념-
로제와인도 곁들였다.
"자, 서울에서 유명한 한국인 셰프께서 우리집에 직접 오셔서 우리를 위해 닭강정을 만들어 준거란다."
우리 버거씨혼자 신나서 떠드는데 무뚝뚝한 넘버투랑 넘버쓰리는 별로 호응이 없다. 오빠 이제 그만해... 나 좀 챙피할라그래.
"진짜 한국인 셰프가 만든거라니까? 이건 정말 크나큰 영광이라구."
넘버 투, 쓰리가 한 입씩 먹더니 맛있다고 나한테 고맙다고 말했다. 기대했던 큰 반응은 아니었지만 버거씨 혼자 세사람 몫의 리액션을 해 주어서 괜찮다.
"오 역시 서울에서 온 셰프는 다르구나. 정말 맛있다. 그렇지 않니 얘들아??"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 치킨무랑 양배추 샐러드가 더 잘 어울렸겠지만 로제와인과 샐러드도 나쁘지 않았다.
버거씨 등뒤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풍경이 너무 예뻐서 주변을 한 번 둘러보며 크게 숨을 내쉬어 보았다.
"오늘이 테라스에서 먹는 마지막 식사일지도 모르겠네. 날씨가 점점 추워지니까."
혼자가 아니라는 건 참 좋은거다.
이 아름다운 테라스에 나와 함께 앉아서 내가 만든 닭강정을 맛있게 먹고 있는 정다운 이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제는 이 곳도 제법 편해졌다. 거의 내 집처럼. 오히려 넘버투랑 넘버쓰리가 이 집 손님같네.
두 아들이 배부르다며 먼저 일어났고 나는 와인을 마시며 계속 이 시간을 음미했다. 아름다운 주말 저녁이다.
버거씨는 내 손을 잡더니 너무 고맙다고 속삭였다. 닭강정을 만들어주어서 고맙고 무엇보다 둘이 함께 요리를 하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고 말했다.
저녁 공기가 너무 좋으니 테이블은 조금 이따 치우고 옆에 잠깐 편하게 앉자고 내가 제안했다.
우리는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서 저무는 저녁을 음미했다. 여름도 끝나고... 내 인생의 한 챕터도 끝났다.
"아이스크림 있어?"
내 질문에 버거씨의 입이 또 한 번 합죽이가 됐다.
"어떻게 그럴수가... 내가 아이스크림 좋아하는거 알면서..."
넘버원이 친히 요리까지 해준다는데 아이스크림도 안사다놓다니.
장난으로 황당하다는 듯 눈을 굴렸더니 내일 두 개 사준단다.
넘버원은 다시 환하게 웃었다. 단순한 넘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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