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은 식었어도 연민은 남아있네. 이건 나도 어쩔수가 없다.
진작에 이혼을 했어야 했는데 전남편이 변호사 구할 돈이 없다며 기다려달라고 해왔었다.
1년 8개월만에 만났다.
마지막으로 무스카델을 한 번 더 볼 수 있도록 내가 그 집으로 찾아가려다가 그냥 스타벅스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 집에 들어가면 온갖 감정들이 다시 쏟아질테니까. 감정을 아껴야지.
그 짧은 기간동안 사람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가 있구나.
와...
급성담낭염 수술받고 살이 겁나 빠졌다더니.
겁나 쪘는데.
우리 엄마는 아직도 전남편보다 잘 생긴 남자를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모습 보시면 뭐라고 하시려나.
입고 나온 티셔츠, 청바지 그리고 재킷까지 다 내가 알던 옷들인데 저 몸만은 낯설다. 표정도 낯설고.
심지어 목소리도 변했다.
살이 갑자기 쪄서 그런지 말할 때마다 숨을 거칠게 몰아 쉬고 땀도 맺히더라. 긴장을 한건지 손까지 떨고.
나는 이 만남을 앞두고 잠을 설쳤드랬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상처를 주고 싶진 않지만 따뜻하게 대해줄 마음은 더 없고. 내가 긴장해서 괜히 저 영악한 인간이 원하는대로 다 하게 할까봐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나 그려보았는데.
나보다 백배 더 긴장해서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오히려 차분해졌다.
내 인생 가장 행복했던 그 기간동안 내 옆을 지켜주었던 사람.
한때 내가 존경했던 나의 영웅이었는데.
그 영웅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었다.
제일 싸고 제일 빠르게 이혼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며 어이없는 소릴 늘어놓더라. 변호사 따로 쓰지말고 소환 요청에 계속 불응하면 저절로 몇 달안에 판사가 이혼 도장을 찍어줄거란다. 그렇게 하면 비용을 아낄 수 있고 자기가 빌려간 돈은 나중에 꼭 갚겠다고 했다. 물론 차용증 같은건 여전히 안쓸거고.
횡설수설하는 그 얼굴을 차분히 바라보던 나는 몇 초간의 정적을 둔 후 말했다.
아니. 그렇게 되면 내 권리는 전혀 없잖아. 당신은 나한테 아무 권리가 없다고 말했지. 하지만 내 변호사는 다르게 말하더라. 작년 당신 집을 나올 때 바로 요구했어야 더 효과가 있는데 당신 말만 믿고 기다리다가 늦어버렸지. 지금이라도 경제적인 도움을 요구할 권리는 있대. 내 변호사 비용은 내가 낼거야. 적당한 선에서 양쪽 변호사들이 금액을 정하게 하고 합의 이혼으로 하자.
"난 지금 돈이 없다고... 돈을 달라고 하면 나는 합의할 수가 없어. 소송으로 가는 수 밖에 없을거니까 마음대로 해. 나는 아무것도 줄 돈이 없다는 것만 알아둬."
거의 울 것같은 표정으로 아파트 주차장 공사에 7500유로를 내야 하고 치과에 3500유로를 내야 한다고 주절주절 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상황이 좀 웃기다. 여기서 대체 누가 피해자고 누가 더 가난한지. 누가 보면 내가 괴롭히는 줄 알겠다.
"이제 내 차례야? 이제 내가 매달 돈 나가는거 얼마인지 말하면 돼?"
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더니 고개를 가로 젓는다.
서로 할 말은 다 했으니 이제 그 사람은 일어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아직 커피를 덜 마셨으니까 이거 다 마시고 일어날거야.
몇번이나 그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키다가 다시 앉기를 반복하는 전남편.
어울리지않게 대화를 시도한다.
한때 내가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그런 평범한 대화 말이다.
무스카델이 요즘 날이 추워지니까 자기 가슴 위에 올라와서 자기 시작했단다. 그리고 요즘 자신도 내가 그랬던 것 처럼 무스카델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단다.
그리고 최근 정신과 담당의를 바꾸었더니 우울증 치료에 차도가 생기기 시작했단다.
다행이네...
숨을 몰아쉬며 나오는 온갖 잡다한 말들을 모두 차분히 들어주었다.
최근에 부서를 옮겼는데 자기를 심하게 괴롭히는 사수가 있어서 너무 힘들단다.
그 부분에서 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을 탓할 수가 없네. 분명 당신이 마음에 안드는 행동을 했을거야."
절대 아니란다. 그 사람이 자기를 얼마나 악질적으로 괴롭히는지 시시콜콜 다 얘기를 늘어놓는다. 그러더니 결국은 글쎄 눈물까지 훔치는게 아닌가..!
저 눈물은...
사수때문에 흘리는 눈물일까
아니면 세상 유일하게 자기 편이었던 전 부인을 오랜만에 만나 자기도 모르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고 있는 자신의 처지때문인걸까.
웃긴건 내 눈에 이 감정없는 인간이 짠해보였다는 사실이다.
에혀... 나도 나를 못 말린다. 어차피 남 생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 이날 이때까지도 자기 얘기만 하고 내 상황은 안중에도 없다.
나는 마치 승리자가 패배자를 바라보듯 연민으로 마주앉아 그말들을 다 들어주었다.
동시에 드는 생각은-
내가 이 멍청이를 원망하고 저주하지 않아도 이 세상은 알아서 이 사람을 벌주고 힘들게 한다는 사실.
내가 딱히 더 원망하고 미워할 필요도 없었다.
전남편이 떠난 후 나는 버거씨에게 전화를 했다. 근무중이었지만 오늘은 아무때나 전화를 주면 받겠다고 말했던 터였다.
온몸에서 불안정한 기운을 뿜어내던 사람을 보내고나서, 따뜻한 버거씨의 목소리를 들으니 어찌나 안심이 되는지.
이렇게 따뜻하고 견고한 문이 내 눈앞에 활짝 열리기위해 오래된 썪은 문이 꽝하고 닫혀버렸던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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