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우리는 걸어서 호텔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런데 길에 사람이 너무 없어서 좀 당황했는데 알고보니 이날이 국경일이었다는...
우리가 두리번거리고 있을때, 연세가 많아보이는 할머니께서 먼저 다가오셔서 스페인어로 여행중이냐고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셨다. 마치 아는 사람을 만난것 처럼 자연스럽게 시작된 대화.
그분은 친절하게도 오늘은 사람들이 다들 스페인 광장 (Plaza de España)에 모여있을거라고 알려주셨다. 그곳에 많은 행사가 있으니 거기로 가보라는 말씀과 함께-
"와, 진짜 친절한분이시네요!"
"내가 이래서 스페인사람들을 좋아한다니까. 호호"
우리는 근처 테라스에 앉아서 맥주등을 마시며 스페인광장의 위치를 확인했다.
운전할때는 몰라도 걸을때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구글맵이 있으니까요! 자신있는 내 선언에 두분은 나만 믿겠다고 하셨다.
과연 스페인광장이 가까워지자 행인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스페인 광장주변에는 레스토랑이며 바와 시장이 모두 밀집돼 있다. 이 다음부터 우리는 스페인광장근처로 거의 매일 왔는데 매번 올때마다 호텔을 이 근처로 잡았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저기 2층에 베란다가 예쁘구나."
"발코니랑 베란다의 차이점이 뭐예요?"
"베란다는 저렇게 유리문으로 막혀있는거지."
아... 평소 헷갈렸는데 이제서야 명쾌해졌다.
광장앞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는 것을 보시더니 어머님께서 메뉴를 확인하시고는 점원에게 영업시간을 물으셨다.
"여긴 분명 맛집이야. 오늘 저녁은 여기와서 먹자."
어머님의 이런 결단력과 안목 덕분에 이번 여행이 많이 수월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한 스페인 광장
사실 스페인광장 자체는 크게 볼 것은 없었다. 그저 얕은 물이 있고 말그대로 그냥 광장이다.
키큰 건물들이 주변에 늘어서있고 맞은편은 바다라서 뭔가 기분이 뻥 뚫리는 느낌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날에는 좀전에 길에서 만났던 할머니의 말씀대로 크고작은 행사가 많이 열리고 있어서 인파들로 엄청 붐비고있었다.
가는곳마다 인파들에 떠밀리느라 나는 아버님이 걱정되었지만 정작 두분은 꽤 들떠보이셨다 😆
"어디 앉아계시면 제가 마실거 사서 갈게요."
하지만 앉을곳이 없음... 😐
마침내! 내가 빈 벤치를 하나 발견하고는 시부모님을 큰소리로 불렀다! 여기예요!!! 이씨! (ici는 욕이 아닙니다, 여기라는 뜻입니다ㅋ)
벤치에 앉자마자 어머님께서는 맥주를 사러가자고 하셨고, 아버님께서 우리 가방과 벤치를 지키고 계시는 동안 우리는 생맥주 세잔을 가지고 벤치로 돌아왔다.
한잔에 3유로였던가? 어머님께서 이 컵 돌려줄까? 하고 물으니 그냥 가지라고 하는 직원.
벤치에서 재회한 우리는 드디어 한숨 돌리며 차가운 맥주잔을 부딪혔다.
"이 컵 안하실거면 저한테 주세요. 자서방한테 기념품으로 주게요."
그렇게 이 컵은 세개다 내가 챙김.
어머님께서는 행사장에서 염소치즈를 꽤 많이 사셨는데 이때 아주 황당한 일을 겪었다.
한 15-17세쯤? 돼 보이는 아랍계 소년하나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아주 위협적인 표정으로 스페인어로 뭐라뭐라 화를내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나는 겁나지도 않았고 돈달라는거구나 싶어서 그냥 무시했는데 자꾸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길래 그냥 영어로 "I don't understand." 이라고 한마디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이 소년, 핏대 세운 얼굴을 내 코앞까지 들이대면서 급기야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것이 아닌가?!
옆에서 지켜보시던 시어머니께서는 치즈 계산을 끝내자마자 그 소년에게 스페인어로 "무슨일이니?" 라고 물으셨고 나는 시어머니께 프랑스어로 "얘 지금 저한테 뭐라는거예요?" 라고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일행이라는걸 알아챈 그 순간 소년은 달아났다.
"쟤 지금 제가 혼자 있는줄 알고 쉬운 타겟이라고 생각한거 맞죠?!"
"응, 자기는 난민이래. 네가 이렇게 한가하게 여행을 다니고 있을때 자기네 난민들은 힘들게 살고 있는게 너무 불공평하대. 그래서 화가 난다는거지."
"협박이네요. 제가 겁먹고 돈 줄때까지 계속 소리지르려고 했던거겠죠."
나는 겁도 안났고 돈을 줄 마음도 없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만일 내가 혼자 여행하는 입장이었다면 도망갔을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저 소년은 계속 따라왔을거고 결국은 택시를 타거나 조금전 행사장 앞에서 봤던 경찰을 찾아가야지... 저 소년은 이런식으로 혼자 여행다니는 동양계 여자들을 타겟으로 꽤 돈을 뜯었을것 같다... 겁먹거나 혹은 귀찮아서 돈을 주겠다고 지갑을 꺼내는 순간 지갑채 털리는 것도 순식간이었을것 같고....
너같은 사람때문에 난민들이 통으로 욕먹는거다이놈아... 널 받아준 스페인에 감사하고 기여할 생각은 안하고 이렇게 관광객들을 괴롭히다니...
나는 벤치에 앉아서 시부모님께 난민들과 공부하면서 겪었던 안좋은 경험담을 한번에 다 쏟아버렸다. 인종차별주의자로 보일까봐 그동안에는 말 안하고 있었지만 혜택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문화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그 마인드와 또 주변사람들에게 피해주는 비매너들하며... 어후...
물론 모든 난민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저 소년때문에 난민들에대해 내 인식이 더 부정적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시어머니께서 구입하신 염소치즈-
잠시후 아버님께서 같은 가게에 다시 가셔서 흰색 염소치즈를 여러개 추가로 구입하셨는데 내가 따라가서 좀전에도 샀다고 말하면서 아주 조금 깎았다. 칭찬해 요용ㅋ
난민소년때문에 잠깐 기분이 욱하긴 했지만 이것도 하나의 경험이니 뭐...
그 소년은 지금 이순간에도 만만해 보이는 솔로 여행자들을 겁주고 돈을 줄때까지 침을 튀겨가며 고함을 치고 있겠지. 아오...
우리는 호텔로 돌아가서 냉장고에 치즈를 넣어놓고 곧 택시타고 다시 레스토랑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다음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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