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만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내가 다짐한 이번 휴가의 테마는 좀 거창하지만 '화합'이었다. (내가 이 말을 할 때마다 내 친구들은 웃더라. 내가 좀 거룩한 표정으로 말했을 수 있음.)
전화로 언니와 엄마를 통해 그간 전해들은 가족들의 근황에서 나는 여러번 외할머니 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겉보기엔 여전히 정정하시지만 고령의 연세로 인해 조금씩 오락가락하시는 외할머니는 우리 가족을 종종 곤란하게 하신다고.
아무튼 이런 저런 사건들로 인해 엄마와 언니 그리고 할머니 사이에는 서로 억울함 혹은 서운함이 조금씩 쌓여 있었는데 내가 볼때 그 모든 복잡한 감정에 앞선 것은 단연 애정과 염려였다. 이 세 맏딸들은 분명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 (외할머니도 외증조할머니가 계실적에 똑같은 푸념을 자주 하셨음.) 서로 서운해도 결국은 또 남들보다 더 끈끈하다. 서로에게 기대하는 게 더 큰 것도 큰 원인이고 고마움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것도 문제다.
우리 가족에게는 팀빌딩이 필요하다.
근처 유원지에 벚꽃이 만발했으니 우리 소풍가자!
할머니가 맨날 노래하시던 김밥을 제가 오늘 싸보겠습니다.
전날 내가 김밥을 싸겠다고 했더니 언니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김밥재료들을 본인 부엌에서 꺼내주었다.
맛살대신에 나는 오뎅을 사다 볶아서 넣었다. 시금치가 들어갔으면 더 맛났을거인디... 그건 패쓰!
사실 내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집에서는 그리 표현을 잘 하는 살가운 막내딸은 아니다.
김밥을 썰다말고 티비를 보고 계시는 아빠 입에 큼직한 꽁다리를 한 조각 넣어드렸는데 이는 나에게 큰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아빠가 노력하시니 나도 이 정도는 해야지.
아빠 차를 타고 유원지로 향하는 길에 우리는 할머니 댁에 들러서 할머니를 픽업했다.
샤워를 막 마치고 젖은 머리를 털며 급하게 나오셨다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꽤 상기되어 있었다. 소풍이라는 말에 너무 들뜨신것이다.
준비한 건 김밥밖에 읎어요ㅋㅋ
아 이곳에 대체 얼마만에 와 본 것이냐.
저쪽에 유치원에서 단체로 소풍을 나왔는지 아이들이 둘러앉아 김밥을 먹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거만 봐도 저절로 웃음이 났다. 나는 이래서 봄이 제일로 좋다. 어릴적 봄소풍을 가는 날 아침 가방속 김밥 냄새가 지금도 생생하다. 오늘은 우리도 김밥 있지롱~
세 어르신을 벤치에 앉혀두고 나는 적당한 자리를 찾기위해 혼자서 넓은 유원지를 한바퀴 돌았다.
소풍나온 사람들이 정말 많았는데 다들 정말 들뜬 표정들이었다. 우리집 무뚝뚝한 세 어르신도 비록 표정들은 뚱하셨지만 속으론 좋으실거라 믿는다.
온 세상이 하얗고 눈부시다.
마침 하늘도 새 파랗다. 오늘 정말 날을 잘 잡았구나!
딱 좋은 자리를 찾은 후 우리도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과자랑 컵라면을 갖고 뒤늦게 도착한 언니도 우리와 합류했다.
헤헤 소풍이다~
5년만에 먹는 내 김밥. 다들 좋아해 주셨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제 김밥이 최고지요~ ㅋ
버거씨가 왕창 사다준 피스타치오 크림은 선물용으로 이집 저집 나눠주었다. 크래커에 듬뿍 발라서 하나씩 나눠줬더니 다들 맛있다고 했다.
준비한건 많지 않지만 김밥에 쥬스 컵라면까지 뭐 있을건 다 있다.
오늘 누구보다 즐겁고 흡족하신 할머니께서 헤헤 웃으시며 큰소리로 입을 떼셨다.
"오늘은 금자 표정이 좋네. 막내딸이 와서 좋은가봐. 평소엔 니네 엄마 저렇게 잘 웃지 않았거덩."
불만인듯 만족인듯 불만같은 만족의 표현.
김밥을 입안 가득 물고 계신 엄마가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셨다.
할머니와 엄마는 서로에게 서운했던 사건들을 앞다투어 나한테 하셨고 나를 포함해서 언니와 아빠는 이미 다 들었던 내용들이지만 다 들어주고 장난처럼 두 사람을 놀리기도 했다.
인생 무거울 거 있나요.
그냥 이렇게 가볍게 웃으면서 털어냅시다요.
제일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을 아프게 하면 내가 더 아파요.
세상 무뚝뚝한 우리 아빠랑 할머니는 이제 먹을거 다 먹었다며 사이좋게 일어나셨다. (연세가 들수록 외할머니랑 아빠가 점점 베프가 되어가는게 아닐까 싶을때가 있다.) 아빠는 조금 전에 개똥을 밟았다며 할머니를 개똥프리존으로 안전하게 안내하며 떠나셨다.
그래도 우리 엄마는 다행히 두 딸과 끝까지 함께 하셨다. 이런 모습으로-
배불리 드신 후 눈부신 벗꽃나무 아래서 깊은 꿀잠.
이 또한 나쁘지 않다.
마침 버거씨로부터 전화가 와서 나는 "우리 엄마 보여줄게!" 라며 이 모습을 비춰주었다. 순간 긴장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던 버거씨가 빵 터졌다. 낮잠을 깊에 주무시는 엄마를 향해 버거씨가 첫 인사를 힘차게 외쳤다.
"엄마 안녕!"
생각치 못한 버거씨의 반말인사에 내가 또 빵터졌네ㅋ
그거 아니라고...ㅋㅋ
우리 가족의 화합을 위한 봄소풍.
오늘 그래도 꽤 성과가 있었다.
나름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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